샌프란시스코의 흥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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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은 도산 안창호가 민족의 자주독립과 인물양성을 위해 ‘우리민족 전도대업의 기초’를 위해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단체다. 재미 한인의 인재양성기관인 흥사단의 이름은 원래 합방이전 본국에서 유길준이 조직한 애국단체 이름이다.

그러나 이미 없어진 단체지만 그 이름이 좋으니 다시 사용해도 좋겠다는 도산의 뜻에 따라 그대로 그 이름을 사용했다.

그 뜻은 ‘인민의 교육으로 전국의 사풍을 흥기’하자는 의미로 정치성이나 종교성을 초연하여 대동단결한다는 본래 취지가 담겨있다. ‘흥사’라는 두 글자는 선비를 일으킨다는 의미인데, 그 목적은 ‘건전인격’과 ‘신성단결’로 인재를 양성해 민족의 독립 달성은 물론 독립 후의 국가건설에도 기여한다는 취지다. 흥사의 ‘사’는 문사나 무사 둘을 뜻하는 것으로 진정한 애국자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일제 식민지 초기에서 오늘날까지 백여 년 간 이념과 조직의 체계성을 보여주는 흥사단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되어 초기 이민의 정신과 힘을 집결하게 한 것은 의의가 크기에 자세히 알아본다.

흥사단 창립 배경과 목적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부산물인 제국주의 정책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식민지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일본은 1854년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문호를 개방하고 나니 자본주의 열강의 경제적 침투를 막아낼 수 없게 됐다. 마침내 귀족 투사 계급은 몰락하고 농민 출신 무사들의 지지를 받아 명치유신이 됐다. 국가 중심적인 산업의 근대화는 군국주의적 성격을 나타내게 되어 그들은 서양에서 손해 본 것을 동양에서 찾고자 했다. 일본의 대외 침략정책은 조선, 만주, 중국을 침략하고 그 나라들을 식민지화했다. 그들의 식민지 정책은 사회적 경제적 수탈에 그치지 않고 민족을 말살하고 소멸시켜 종속신분 층을 만드는데 중점을 두었다.

1910년 한반도 강점이후에는 식량 및 원료 공급지의 상품을 시장화하고 중일전쟁이후에는 인적 물적 수탈을 자행했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긴 일제치하의 항일 독립운동은 지도세력의 권력투쟁으로 분열과 대립을 거듭하자 민주 인사들의 저항은 여러 형태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개화운동 및 동학 농민운동, 을사보호조약 이후에는 의병투쟁과 애국 계몽운동이 일어났다. 종교와 함께 들어온 서구의 사상과 문화는 민중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서재필의 독립협회운동은 인본주의를 기초로 한 사상적 현대화의 싹을 트게 했다. 자유사상에 입각한 새로운 지식층의 주도로 독립협회가 조직되자 도산은 평남 강서 지방에 점진 학교를 세우고 개화 계몽을 하다 한계를 느끼고 도미, 유학의 길에 올랐다. 나라의 주인이 되는 백성의 힘을 향상하고 시민의 자질을 갖추도록 훈련시켜 민중의 힘을 기르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흥사단의 창립목적은 ‘무실역행을 생명으로 삼는 충의남녀를 단합하여 정의를 돈수하며 체덕지 삼육을 동맹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지으며 신성한 단체를 이루어 우리 민족 전도 번영의 기초를 수립함’이었다.

흥사단 강령과 정신

흥사단의 2대 강령은 건전인격과 신성단결이었다. 삼대수양은 체육, 덕육, 지육으로 건강하여야 지식을 발휘하므로 체육을 먼저 두었다.

사대정신은 무실역행으로 한마디로 “거짓말 없는 민족이 되자”는 것이었다. 동맹수련은 단의 중요한 사업이었으며 정의돈수는 단의 중요한 활동이었다.

◈ 무실: 거짓을 버리고 허위의 사상과 습관 허례를 버리고

진실을 찾자는 정신

◈ 역행: 공리공론을 버리고 한 가지 일이라도 실행하며

노력하자는 정신

◈ 충의: 충실하게 의리를 지키며 책임감 있게

신용을 세우자는 정신

◈ 용감: 옳은 일에는 돌진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는 견디고

참으며 나약한 태도를 청산하고 주위 환경의 곤란을

극복하는 적극적인 정신

◈ 동맹수련: 흥사단의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나부터 먼저 고치고 민족을 고치게 하자는 주장으로 서로 격려하고 견제하여 수련의 힘을 발휘하는 단의 사업 중 가장 중요한 사업이다. 동맹수련 과목은 건전인격과 신성단결(변치 않고 깨어지지 않는 단결)과 사회대공의 세 가지가 있다. 문답, 입단식과 서약, 집회 출석의 의무, 동맹 독서, 동맹 운동 등이 동맹 수련의 중점이다. 동맹저축과 동맹수련을 강조하는 흥사단에서는 단우들로 하여금 일상생활에서 수행한 업무와 운동, 독서 등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기록하도록 했다. 하루 책 한 페이지 이상을 읽고 3분 이상 운동을 하고 일상생활에 수행한 업무와 일을 매주 반장에게 서면으로 보고하는 의무를 정하여 실시했다.

◈ 정의돈수: 단의 성격 중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 사랑하는 것이 단결을 위한 힘의 원천으로 여겨 일반국민도 고취해야 할 덕목으로 서로 사랑하는 정신을 더욱 기르도록 사랑하기 공부라는 뜻이다. 동맹저금제도를 두어 경제적 힘을 기르게 하였고 단내에 경위금 제도를 두어 단우의 경사와 환난 때 부조금을 보내게 하였다.

회원 중에 경사나 불행에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축하, 위로하는 회원 간의 상부상조하는 수련이다.

단우의 자격은 품행이 단정하고 장래가 유망한 인물로 일생동안 신의 있는 생활을 맹약하고 그를 준수할 수 있는 인물로 제한하여 단우 모집이 쉽지 않았다. 일상생활의 철저함이 흥사단 이념을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이 계발될 것이라는 도산의 신념이 반영된 것이었다. 흥사단 창립이후 도산은 상해에 갈 때까지 6년 동안 단우 모집에 전력해 3.1운동 이전에 이미 150명이 됐다. 도산의 사업 중 도산이 제일 정성을 들인 사업으로 흥사단에 입단한 단우들의 신상기록이 입단번호와 함께 빠짐없이 보관되어 있어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흥사단 약사

20세 청년으로 독립협회운동에 가담하였던 도산은 미국유학에서 급거 귀국하여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일으켰다. 대한매일신문, 황성신문, 제국신문에 새로운 사상을 고취하고 ‘지식은 힘이다.’라는 신념아래 항일운동인 동시에 민주화운동, 현대화 운동에 불길을 일으켰다. 비밀결사 신민회는 전국유세 강연 외에 교육 실업기관을 창설하고 청년학우회를 1909년 2월에 창설하였다. 진실한 민족의 혼을 자각함으로 진실한 독립 국가를 찾자는 청년운동이었다. 언변보다는 실행을 형용보다는 내용을 준수하는 무실역행의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 육당 최남선이 중앙총무로 도산 선생을 도와 실무를 담당했다.

‘청년학우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청년운동으로 2년의 짧은 수명으로 사라졌으나 그 취지와 목적 및 운동방침은 흥사단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1913년 5월 13일 금요일, 샌프란시스코의 강영소 자택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35세 도산 안창호의 주선으로 흥사단이 발족되었다. 동지 25명 중 여덟 명의 팔도대표를 창립위원으로 정하였는데 창립위원으로는 홍언(경기도), 조병옥(충청도), 송종익(경상도), 정원도(전라도), 강영소(평안도), 김종림(함경도), 민찬호(황해도- 이견도 있다), 염만석(강원도)이었다.

창립위원을 8도로 구성하였던 것은 지방색의 후환을 막으려는 뜻이었다. 각도 인사를 망라하기에 일 년 여의 세월이 흘렀는데 조병옥 정원도 강영소로 하여금 발기하여 단원을 모집하게 했다.

일일이 문답을 치르게 했고 도산이 직접 질문했다.

창립당시 흥사단 본부는 북미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벙커힐 거리에 두었다가 1915년 피게로아 거리로 이전하였다.

1932년 7월에 이르러 로스앤젤레스 남 카다리나 34211번지에 대지를 사들여서 2층 유선양옥을 지어 이전했다. 1913년 12월 19일 제 1차 흥사단대회가 새크라멘토와 클레어몬트 두 지방에서 열렸다. 도산은 창립 초창기 ‘4번 단우’ 혹은 ‘전권위원’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안건의 진행에 대한 보고를 받고 지시 또는 권고했다.

1914년 10월 5일 도산 선생의 담임 편집으로 등사판인쇄로 흥사단보를 창간했다. 그 목적은 단우와 단의 연통을 도모하고 단의 주의와 정신을 부단히 고취하기 위함이었다. 제1차 대회를 1914년 12월19일에 북방에는 새크라멘토, 남방에는 클레몬트에서 열어 50년간 해마다 거르지 않고 대회가 개최됐다. 대회의 목적은 동지로서 전 단원이 하나 되어 정신과 의사를 통일하여 단세를 굳게 하고 단의 전도방침을 크게 토의 연구함이었다. 1948년 1월 5일 미주에 있는 본부를 서울로 옮겼다.

흥사단 단기와 단기가

1913년 창립당시 도산 선생이 고안 창정한 것으로 황홍백청의 네 가지 색으로 황색은 무실, 홍색은 역행, 백색은 충의, 청색은 용감의 뜻이다. 기머리 중심에 백색원형이 있고 원형 안에 날아가는 기러기 모양의‘사’자가 있다. 원형은 단결의 뜻이고 ‘사’자는 ‘흥사’의 뜻이다. 도산 선생의 흥사단 단기가는 전진하는 흥사단의 기상도가 살아있는 것 같다.

도산 선생이 고안한 흥사단기(좌)와 오늘날의 흥사단기(우)

황금같이 순결하고 열혈같이 붉었도다

청천같이 푸르렀고 백일같이 뚜렷하다

두 날개를 널리 피어 향상하고 전진하네

광명하다 이 깃발이 흥사단의 대표일세

기러기야 내 단기야 너는 나의 사랑이요

너는 나의 인도로다 영원토록 같이 하세

도산 외에도 흥사단 창립위원의 한사람인 송종익도 단기가를 만들었고 정인과 염만석도 흥사단 제1회 시집에 단기가를 발표했다.

흥사단의 사명

“한국을 살리기 위하여 먼저 기초역량을 기르려 하는 것이요 그 기초역량은 곧 사람의 힘, 곧 건전한 민족성의 발현 배육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환경과 전통이 좋지 못하여 나빠진 국민성을 회복하여 우리민족의 이상을 실현할 힘을 얻게 전문적으로 교육시키고 육성시키는 일대 운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상적 국가를 건설하려면 그 사업을 능히 담당할만한 힘을 기르자는 것으로 그 힘은 곧 사람으로 민족 한 사람 한 사람이 국가의 번영과 사회의 진보를 담당할 각오와 능력을 기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을 합하여 민족공동의 사업을 움직일 수 있는 힘으로 다시 기르는 것이 사명이다.”

흥사단 약법과 조직

1913년 창립당시 약법은 흥사단 약법의 기초위원 안창호, 강영대, 곽림대 3인이 클래몬트 학생양성소에서 일주일간 자취하며 토론 연구하여 약법과 행정 세칙을 작성하였다. 1933년 1차로 약법을 개정하고 도산이 타개한 후 1947년 2차로 약법을 개정하였는데 성격은 창단 약법으로 회귀하고 있다.

창립당시 약법에는 “본 단의 목적은 무실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충의남녀를 단합하여 정의를 돈수하며, 체 덕 지 삼육을 동맹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지으며 신성한 단체를 이루어 우리 민족 전도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에 있음”이라고 되어있다. 개정된 흥사단의 약법은 다음과 같다.

“오랜 전통을 가진 우리 민족이 발전적인 민주 사회를 이룩하려면 먼저 국민 각자가 올바른 정신적 자세와 왕성한 부흥 의욕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정신적 자세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 모든 분야의 여건 변화에 영향을 받으나 사람은 또한 환경을 개선 창조하는 원동력을 가졌다. 따라서 민족을 부흥시키려면 참되고 진취적이며 협동적이고 용기 있는 일꾼들이 민족적 사명감을 갖고 실천 봉사하여야 하며, 이런 일꾼의 양성을 위한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주창한 구국 이념으로서 민족을 참된 길임을 확신하는 우리는 자신의 사회적 직무와 위치에 구애됨이 없이 흥사단 운동에 평생 바치기로 이에 동맹한다.”

흥사단 단우는 통상 단우와 예비 단우 그리고 특별 단우 3종류로 구분되었다. 단우 선정과정에서 매우 엄격한 절차를 두고 있었는데 입단문답은 도산이 직접 하였다. 통상단우에게는 고유의 단우번호가 부여되었는데 자격은 연령이 17세 이상으로 허위의 언행과 나태한 습관이 없고 무실역행의 정신으로 수학하여 단결의 신의를 확보할 수 있는 자로 정했다.

재정은 단우의 입단금과 예연금, 의연금, 기부금, 적립금에 의존했는데 단우의 입단금은 20원이었고 예연금은 매계 1원이었으나 정형을 참작하여 양의 감액이 고려되었다.

조직은 입법, 사법, 행정 3부로 8인 1반을 조직하여 군대식 신속 교통제도를 채용하였다. 의식은 홍 황 2색을 무실과 역행의 색으로 단우 각자가 2색의 기념대를 두르게 하였다. 상호간의 칭호는 ‘군’이라고 하고 기장과 장식물에 2색을 쓰게 하였다.

흥사단의 사업

흥사단은 단우의 합자회사로 대동실업회사를 조직하여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일본인의 간장을 사서 소매물로 병을 만들어 팔다가 수만 달러의 자금을 허비하고 실패하였다.

흥사단 단우를 모집하며 접촉하는 동포에게 실업회사 조직 계획을 말하고 2만여 달러의 자본금을 모았다. 1917년에는 ‘북미실업 주식회사’라는 주식회사를 정식으로 설립하였다. 1918년에는 자본 총액이 5만 여 달러나 되었다. 도산은 우리 민족 사회 가운데 금융기관이 성립되어 국제무역에 신용 거래를 할 만한 재단을 갖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북가주 윌로우스 벼농사에 3만 달러를 투자하였다가 홍수가 나는 바람에 손해를 보았다.

도산은 친구 박영순이 벼농사 투자를 해달라고 맡긴 돈 1만 달러를 프랑스에 임시정부의 위치가 위험하게 되자 임시정부 안전 보장을 위해 썼다. 그러나 이를 수상히 여긴 사람들이 북미 실업주식회사 공금을 썼나하여 법정소송을 일으켰다. 사업투자의 실패와 법정소송 등으로 결국 1929년 회사는 해산하게 되었다. 마지막 북미실업회사 정리는 김종림, 김순권, 곽림대 3인이 맡아 해결하였다.

흥사단 연보

1909 겨울 도산 선생은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일을 보는 중에 청년동지들에게 흥사단 정신을 선전하여 원동위원부를 만들었다.

1912 남가주에 클레어몬트 한인학생양성소로 가서 송종익에게 ‘흥사단 약법’의 초안을 보이고 상의했다.

1913 5. 13. 샌프란시스코 강영소집에서 각도 대표 8명과 흥사단을 창립하였다.

1915 흥사단우 제1회 시집에 단우 36명의 작품발표와 ‘흥사단 단기가’를 등사판으로 발행하였다.

1914 10. 5일 흥사단보를 발행하고 9월에 단우수는 50여명으로 증가했다. 로스앤젤레스 남카다리나 34211번지에 대지를 사서 2층 유선양옥을 지어 단소가 아주한 후 1919까지는 미주에서만 활동

1919 겨울 상해에 단소를 설치하고 입단자가 늘어 본부에 청원하여 원동위원부를 두었다.

1920년 중국의 원동위원부와 본국의 수양동우회를 조직하는 등 1931년까지는 흥사단을 알리는 시기였다.

1922 이광수가 상해에서 입단한지 얼마 안 되어 본국으로 돌아와‘민족개조론’을 잡지에 발표해 흥사단 기본이념이 처음 공개되었다.

1922. 2. 12. 서울 당주동 이광수집에서 수양동우회를 조직했다..

1923. 1. 16 평양에서도 동우구락부가 생겼다.

1925. 10. 11. 평양에서 합동교섭을 하여 1926년 합동된 회명을 수양동우회라고 하고 1929년 11월 23일 수양동우회와 동우구락부는 동우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탄생했다.

1926. 5. 단의 사업으로 ‘동광’잡지를 창간하였으나 1933년1월 40호를 내고 폐간되었다. 주간에는 주요한이 고문은 이광수가 맡아 많은 집필을 했다. 도산 선생이 산옹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발표했다. 동광 폐간 후 이광수 주재로 동광 총서 두 권이 발행되었다

1932년부터 1945년까지는 중국방면과 국내조직이 강제 해산을 당하며 수난을 당했다.

1937. 6. 중일전쟁 한 달 전 일본관헌이 동우회 회원 수백 명을 검거하여 치안유지를 위하여 단체해산을 명하였다.

1945. 12. 미주에서 재미한족연합회 대표단이 본국을 심방 할 때 그 중의 단원들이 국내 동지와 의논하여 1946년 1월 5일 주요한집에서 흥사단 국내위원부를 조직하였다.

1946년 서울로 본부를 옮겨 1961년까지 활발히 활동했다.

1948. 1.5 미주 흥사단 본부를 서울로 옮겼다.

1949 봄에 국민일보를 창간했으나 재정문제로 이내 문을 닫았다.

1950 6.25사변으로 많은 동지가 희생되고 단소도 부산으로 피난하였다가 1953년 서울로 돌아왔다. 미주에 위원회를 두었다

1954. 9. 동광과 비슷한 순수한 우리말로 된 잡지 ‘새벽’이 단에서 경영하는 준 기관지로 나왔다 ‘동광’과 ‘새벽’을 통산하면 92호로서 100호 가까운 잡지를 통한 단의 문화 사업은 우리나라 해방 전후를 통하여 많은 문화적 공헌을 했다.

1962. 단체등록이 취소됐다가 1963년부터 재출발했다.

흥사단 단보

도산 선생의 담임편집으로 1914년 10월 5일 단보를 창간하였는데 간략한 등사판인쇄였다. 그 목적은 단우와 단의 연통을 도모하고 단의 주의와 정신을 부단히 고취하기 위함이었다. 이 단보에는 단의 포고문, 단우 및 행사의 소식, 교양 논설 등이 수록된 일종의 기별지였다. 1915년 8월경인 듯 달의 월간합계를 보면 독서분량 3천 2백 38장에 운동시간 97시간 13분으로 상세한 보고가 올라와 있다. 그 무렵 50명의 단우가 체, 덕, 체, 3육을 수련하며 동맹독서와 동맹운동을 실시하는 것을 보여준다.

1915년 9월에 나온 제1권 10호에는 도산의 문체로 보이는 ‘낙심과 절망은 곧 정신의 자살’이라는 글이 실렸는데 “절망하고 낙심하면 그 사람은 곧 죽은 사람이요, 그와 같이 죽는 수효가 많으면 우리의 가장 사랑하는 반도강산이 그 뉘를 의지하리오”라고 하며 “유쾌한 취미를 일으켜서 저 낙심과 절망의 함정으로 빠져 들어가는 우리 민족의 빛이 되며 표준이 되자”고 역설하였다. 도산은 단보를 통해 민족의 원기를 날로 증진시켜 민족의 실력을 날로 더욱 쌓아나가길 희망했다.

흥사단 정신의 계승

흥사단은 일본 제국시대에는 민족 독립운동단체로서 국권회복에 기여할 인물 양성에 노력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의 운영자금조달을 하는 등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해방 후에는 국민 계몽단체로 금요강좌와 ‘새벽’지의 발간으로 자유와 만주사상을 고취하여 4.19 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창단 50주년을 맞은 1963년부터는 한국 사회지도자 양성을 위한 청년 학생운동으로 ‘흥사단 아카데미 운동’을 전개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지금도 90여 년에 걸친 역사와 전통의 바탕에 3대 시민운동으로 ‘민족통일운동’ ‘투명사회운동’ ‘교육 청소년운동’을 설정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미주 흥사단원 명부

괄호 안의 통상 단우 번호는 입단 순서와는 다르다.

(410부터 460번은 일련번호)

1913년 입단 / 하상옥(1) 강영소(2) 정원도(3) 안창호(4) 황사용(5) 양주은(6) 홍언(7) 민찬호(8) 황사선(9) 김홍균(10) 김병규(11) 이석진(12) 이응목(13) 박봉렬(14) 윤응호(15) 정동업(16) 윤진오(17) 마춘봉(18) 김관유(19) 송종익(20) 문영운(21) 강영대(22) 이건영(23) 이영수(24) 염만석(25) 조성환(26) 정영도(27) 김순학(28) 조갑석(29) 현승렬(30) 임준기(3) 임성기(32) 정인과(33) 김종림(34) 임초(35) 신달윤(36) 곽림대(37) 길천우(38) 이일(39) 윤지한(40) 이운경(41)

1914년 입단 / 김병연(42) 오림하(43) 윤필건(44) 김관흥(45) 조병옥(46) 이인신(47) 이전(48) 김계선(49) 조종문(50) 박영로(51) 백일규(52) 박선(53) 김종덕(54) 박인탁(55) 박돈욱(56) 신광희(57) 박영순(423) 변기현(427)

1915년 입단 / 차희선(58) 김기만(142)

1916년 입단 / 박영직(61) 최윤호(62) 천세헌(226) 정원현(448)

1917년 입단 / 한장호(59) 최능익(60) 최재덕(63) 이락주(64) 황보정길(65) 최석영(66) 신현모(67) 계옥룡(68) 박일우(69) 최희송(70) 장리욱(71) 김태진(72) 최진하(73) 한병선(74) 김영훈(75) 이암(76) 한승곤(77) 노정민(78) 하희옥(79) 이용근(80) 양철(81) 이초(82) 손정도(109) 한시대(179) 임성택(272) 나진곤(421) 이창성(438) 조득린(449) 조명구(450) 차정석(452) 함계택(456) 허승원(460)

1918년 입단 / 조울림(83) 조문해(84) 허진업(85) 오익조(86) 송상대(일명 송도경)(87) 이용선(88) 최능진(89) 김창만(90) 김기창(136) 김기홍(410) 김동순(411) 김명순(412) 김정식(416) 강명원(420) 사덕순(428) 이경상(435) 이명상(436) 이명원(437) 이재수(439) 이우식(440) 이규하(441) 이인상(444)허 완(445) 차용환(453) 최대현(454)

1919년 입단 / 김성권(91) 김병한(92) 곽용주(93) 양홍(94) 명일선(95) 황사근(96) 이원석(97) 김진규(415) 이종오(443)

1920년 입단 / 장병훈(98) 최봉민(99) 박영관(100) 김기후(102) 변준호(102) 박영제(114) 이문하(117) 김득부(119) 김여택(120) 손이도(131) 조진환(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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