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신문으로 본 미국 초기 이민사회: 그들은 이렇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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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이민이 처음 시작된 하와이에는 1903년 1월 13일 도착한 101명을 선두로, 같은 해에 1천133명, 1904년에는 3천434명, 1905년에 2천659명 등 2년여 동안 총 7천226명이 들어왔다. 이들은 15회에 걸친 이민 모집에 모두 65척의 배로 이주해 왔다. 6천48명이 남자였고 637명이 여자, 541명이 어린이였다.

그러나 983명은 고된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고국으로 되돌아갔고, 하와이에 있던 많은 한인들은 1904년부터 미 본토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05년부터 1907년까지 약 1천 3명의 한국인 노동자가 철도 공사장, 어업, 광산 등에 일거리를 찾아 미 본토 서부지역으로 들어왔다. 그 외에도 농장 등의 일거리로 들어온 한인들도 많아 하와이에서 온 한인들의 숫자는 약 2천명에 이르렀다.

1905년 11월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에 앞서 일본은 해외한인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하와이 노동이민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고종황제의 명으로 세워진 수민원은 예산이 없어 설립 11개월 만인 1903년 10월 이미 문을 닫은 상태였고 이민개발회사도 1905년 4월에 내려진 해외 이민금지령과 함께 폐업했다.

일본이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을 금한 것은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하와이에 먼저 들어와 세를 형성하고 있던 일본기업가들, 노동자들이 한인들과의 경쟁을 두려워해 일본정부에 한인 이민 금지를 요청한 것도 한 원인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러일전쟁으로 부족한 인력을 한국 사람으로 대치하였으나 전쟁이 끝나면서 필요성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정부에서 계속 이민금지에 대한 압력을 넣은 것은 해외 한인들의 반일사상을 금지하려는 정책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일본 노동자에 대한 배척이 매우 심했다. 이와 관련 1907년 3월 루즈벨트 대통령은 하와이의 일본인과 한인 노동자들을 미주 본토로 이주할 수 없게 하는 법안을 제출, 의회에서 통과시킨다. 또한 미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한 한국정부의 여권을 앞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발표한다. 이에 따라 1907년 11월부터는 한인이 미국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일본 외무성이 발행한 여권을 소지해야 했다. 1910년 미국 관계당국에서 조사한 한인인구는 하와이 4천533명, 미 본토에 461명이었다. 본토의 경우, 이보다 훨씬 많은 한인들이 살고 있었으나 인구조사에 응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11년에 이민 온 한인은 불과 8명에 불과했다.

이민이 중단 된지 5년 후 대한인국민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고국으로 돌아간 남자가 946명, 여자가 19명이었고 사망자는 45명이었다. 하와이에 계속 체류한 수는 4천187명이고 하와이 출생 자녀수는 107명이었다. 미국본토로 이주한 한인들은 철도회사나 농장에서 일할 기회가 많고 보수조건도 좋다는 소문을 듣고 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1910년까지는 적어도 2천~2천500명이 샌프란시스코나 로스앤젤레스 등지에 정착했다.

1922년 7월 4일 독립기념일에 뱃놀이 하는 오클랜드의 한인들

1918년부터 1922년까지 197명의 사진 신부가 미국으로 왔으며 정치적 망명객이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약 1천명이 왔다. 1910년부터 1919년까지 상당수가 여권 없이 한국을 탈출하여 도미하였는데 이들을 한국에서는 ‘피난학생’으로, 미국에서는 ‘신도학생’으로 불렀다. 이들은 국적이 없는 형편이므로 대한인국민회가 보증하여 입국을 허용 받았다

1921년부터는 일본의 한국통치 형태가 무관에서 문관으로 변해 한인들에게도 일본여권을 가지고 미국에 유학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때부터 1940년 사이에 온 사람의 수는 289명. 일본은 한인 유학생에 대한 감시를 통해 공부가 끝나거나 등한시할 경우 곧바로 귀국토록 했는데,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15%에 달한다.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0~41년 사이에 미국에 입국한 사람은 성경책을 사기 위해 온 목사 2명과 유학생 2명 등 4명이 전부였다.

1940년 외국인 등록법안이 의회를 통과해 8월 27일부터 12월 26일까지 외국인 등록을 실시하게 되는데 총 474만 1천명이 미국 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46년부터 미군과 결혼한 외국인 부인들이 도미하기 시작하고 해외주둔 미군부대 및 미국기관과 관계있는 사람들, 유학생들이 크게 늘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영주권을 얻어 미국에 정착했다. 한인의 경우 1959년부터 1969년 기간에는 총 3만3천518명이 이민 온 것으로 되어있다.

1922년 7월 2일 샌프란시스코 근교 Mill Valley 한인들

초기 이민의 귀국

초기의 이민들은 힘든 노동에 지쳐 고향을 그리워하여 외로움 속에 빠져 있었다.

부인과 자식들을 두고 혼자 미국에 건너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딱히 낙이 없었던 이들은 피곤함과 외로움을 잊으려 술과 마약, 도박에 빠지는 경우가 있었다. 도박으로 돈을 잃은 사람들은 빚을 얻고, 그 빚을 감당하지 못하면 도둑질을 하기도 했다. 한 눈 팔지 않고 열심히 일해 모은 다른 한인들의 돈을 훔쳐 사라지거나 귀국해 버리는 경우가 생겼다. 어떤 이는 농장 사람들이 모아둔 돈을 턴 후 도망가기도 했다.

그렇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 중에도 고국 향수병에 걸리고, 고된 노동과 낯선 생활에 회의를 느껴 귀국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는 병을 얻어 귀국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1905년 제국신문과 1906년 경향신문에는 미국에서 돌아오는 한인들의 기사가 자주 실렸다. 이 기사에 따르면 병에 걸려 부득불 귀국하게 되는 이민들에게 이민회사 측에서 배려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행처럼 한인사회에 번지자 미국 내 한인 대표단체 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는 1909년 10월13일자에 ‘귀국자에게’라는 사설 등 여러 차례의 글을 실어 귀국을 만류했다. 또한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눈물로 떠나온 고향에 돌아가 보니 모국동포에 대한 실망과 실업 때문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는 사람의 경험담을 보도하기도 했다.

◈ 1909. 4. 7: 귀국하고 싶지만 아직은 시기가 아니다.-비독립무귀국가

독립이 아니면 돌아갈 나라가 없다. 누구든 돌아가고 싶지만은 나라 없고 집이 없으니 힘들고 고생스러워도 기다렸다 독립이 되면 돌아가고 강개한 음성으로 귀국가나 한번 불러보자.

‘귀국가’ “도라가세 도라가세 재미동포 도라가세 (중략)/자유종을 크게치고 독립기를 높이들어/유진무퇴 하올적에 귀국하세 귀국하세 (중략)

◈ 1909. 10.13: ‘귀국자에게’- 좋은 기회를 값없이 버리지 말아라.

“청인은 캐나다까지 오는데 입국세로 오백 원씩을 들여서도 온다.

이 미국은 세계에 유명한 황금세계라. 한 시간 노동이면 대한 돈으로 엽전이 닷 냥이오, 하루 일만하면 엽전 편으로 40량이고 한 달이면 황금을 한줌 쥐여 주노니 동양 천지에 무엇을 하여야 이 같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느뇨. 동양 이민이 막힌 후 노동자의 자격으로는 천금을 허비하여도 미국에 발을 붙일 수 없나나 귀국코자하는 자에게 특별히 권고 하노니 제발 가지 마시오. 가려거든 돈이나 남과 같이 좀 많이 벌어 가지고 가기를 바라노라. 3, 4백 원을 넘기지 못하고 가는 이유가 부모처자의 정 때문이라 하나 결단코 경솔히 귀국하여 다시 만나기 어려운 기회를 헛되이 버리지 말기를 바라노라.”

신한민보를 통해 본 북가주 이민사회상

당시 한인들은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미국의 지명을 자신들이 부르기 쉽게 지어서 사용했다. Honolulu는 호항, San Francisco는 상항, Los Angeles는 나성, Washington DC는 화부, Riverside는 하변, Salt Lake City는 염호, Sacramento는 삭도, Mexico는 묵국. 블라디보스톡은 해삼이 많이 난다고 하여 해삼위라 불렀다.

◈ 1907. 9. 20: 샌프란시스코에 흑사병이 발생하였다.

◈ 1907. 10. 4: 새크라멘토에서는 청인지역에 자주 내왕을 하면서 항상 아름답지 못한 일이 많은 고로 그곳에 거류하는 동포들이 청인 거류지에 내왕치 못하는 규칙을 정하였다.

◈ 1907. 10. 11: 상항에 흑사병 예방에 주의하여 경찰관리가 각 음식점을 검사하고 청결법을 시험하며 쥐를 잡는 대로 1마리에 10전씩 주고 산다더라

◈ 1908. 1. 15: 상항부윤 텔라씨는 피선한 이후 풍기를 숙청하기에 진력하여 일인의 매음가는 청인거주지로 쫓아내어 상항 시내가 깨끗하여졌다.

◈ 1908. 5. 20: 새크라멘토에 우리 한인의 집이 3처가 있더니 그간에 큰집 하나를 출세하여 그 안에 공립대동량회사 사무소와 미순 전도서(전도하는 곳)와 여관이 모두 같이 모여 지내는 형편이 매우 아름답다 하더라.

◈ 1908. 9. 9: 본 회관에서는 왕래하는 여러 동포의 숙식을 편리케 하기 위하여 이사하였사오니 조량하시옵. 새크라멘토 공립관 시무원 윤경학고백. 406 O St. 새크라멘토 아편 하는 동포가 있다.

◈ 1909. 2. 17: 상항 국민회관에서 이상보다 실행이 귀하다는 문제로 이대위, 정원도, 송종익 토론하였다.(당시에는 매주 토론이 있었다.) 일이 없는 상항의 한인들이 오클랜드 청인의 소굴로 와서 잡기에 빠진다.

◈ 1909. 3. 24: 오클랜드에 사는 자들은 무뢰방탕한 자들이 많다. 알라스카에 가는 선급을 다 털리고 도망한 한인들이 있어 청인 일인이 신한민보에 신고하다.

◈ 1909. 5. 26: 함경남도 문천군에 흉년을 당하여 미주에 있는 동포가 구제금을 모집하고 와이오밍의 서페리오와 래울린스의 동포들이 모금하여 보냄.

◈ 1909. 6. 2: 상항 현재 인구가 외국인을 빼고 60만인데 3년 전에 비해 3배가 늘었다.

◈ 1909. 10. 6: 한인의 악습을 슬퍼함-음식점에서 빚진 것들을 부끄러워하라. 회개하라.

“빠는 자(아편)와 붓치는 자(노름)에게 경고 하노라”-양두학.

아편을 빨고 청인의 테이블에서 노름하는 자들에게 애끓는 호소

“세계상에 아픈 병이 많지마는, 나라 잃고 갈 데 없는 우리보다 더할 자 없으며 슬프고 가련하고 부끄러운 일이 많지마는, 남의 노예 된 우리보다 지나칠 데는 없도다 …… 목이 마르도록 여러분께 비옵거니와 노형네가 빨고 붓치는데(노름) 해를 돌보지 않고 하더라도 특별히 부탁하니, 타국사람 속이고 외상 밥과 외상 잠이나 조금 자고 먹지 마시오. 모 지방에서는 한인이라 하면 고개를 흔들면서 돈 주고도 밥을 사먹을 수 없고 잠을 잘 수도 없다. 개중에 말하기를 너희 한인이 전방에서 몇 원 지고 아무 여관에 줄 밥값이 얼마라 하니 어서 바삐 회개하고 신문도 사보아 사회를 아시오. 사회에서 출세하여 망한 나라를 건져서 우리 자유 복락을 누리기 비노라. 빨고 붓치는 동포들이여.”

◈ 1910. 11. 29: (대도) 한인구락부-상항에 재류하는 청년동포들은 돈독히 하는 뜻을 도타이 하기 위하여 구락부를 조직하고 와일니 에비뉴 28호에 신설한 구락부집에서 새 구락부 여는 예식을 행하였는데 예참한 인사가 많더라.

◈ 1913. 6. 30: 상항 인구는 현재 50만 5천652명으로 작년보다 2만3천722명이 늘었다.

◈ 1913. 7. 4: 상항 지방정부에서 놓은 기어리 St. 전차는 지난 달 26일부터 페리 정거장까지 통하였는데 첫날 수입이 1천1백 96원 75전으로 수입이 매일 증가하는 모양이다.

미국 군사들은 독립일에 굉장히 논다. 우리도 그날을 한번 보면 죽어도 한이 없겠네.

◈ 1913. 10. 13: 미주에 처음 되는 일-“우리 북미총회에서 사회를 확장하기 위하여 동포들에게 의무금을 5원씩 거두는데 남자들은 벌써 몇 회를 그의 의무를 다하였으되 부인 가운데서 한사람도 아직 의무 관념을 하는 이가 없더니 근일에 도부인 인성씨가 먼저 남녀 동등권리를 생각하고 부인중에 처음으로 의무금 5원을 내었으니 이는 미주 부인중에 처음 되는 일이더라”

◈ 1913. 11. 21: 오클랜드 시는 술파는 세를 5백 원에서 1천 원으로 올리고 내년 7월까지 396개 술집을 200개만 되게 하려한다.

◈ 1914: 상항지방회에서는 18일 토요일에 ‘재미 한인은 교훈보다 성취를 먼저 할 일’로 성취론에 손병현, 교훈론에 조병옥이 연설을 하였다.

샌프란시스코 박람회에는 29개국이 참가하였다.

◈ 1915. 7. 12: 스탁톤의 오진국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용만을 모욕하고 9월28일 소노마선편에 하와이로 좇아 가다가 30일 물로 투신하였다. (안창호를 추종하던 그는 호텔 방에 침입해 박용만을 저격했으나 부상만 입히고 이승만을 암살하기 위해 하와이 행 배를 탔었다.)

◈ 1916. 4. 27: 5백만 년의 진주발견-“산호제 사람으로 스탠포드 대학 지질과 학생이 4월 20일 지질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다가 진주를 발견하였는데 어림컨대 진주의 발생이 5백만 년이 되었더라. 장래 스탠포드 박물관에 진열하여 연구 자료를 삼으리라 하였더라.”

◈ 1916. 8. 10: 6일 맨티카 지방회에서 동지방 한인 부락을 자치를 위해 한인경찰 1인을 두기로 가결하고 동 지방 경무청에 교섭위원 문양목, 황사용, 한장호, 최능익 4씨를 선정하였다.

◈ 1916. 9. 28: 샌프란시스코 박람회 회장 안에 수족관 건축 준비/금문공원에 가주 박물관 9월22일 개막.

◈ 1916. 9.30: 상해로부터 한인 16인과 부인 및 여학생 10인이 샌프란시스코 도착하였는데 3인을 돌려보내고 11월15일에 도착한 25인중에 12인을 불합격이라 하여 환송하였다.

◈ 1917. 3.15: 가주 외국인 21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에게 4원의 인두세를 받자는 의안 통과.

재미 한인과 차이나타운-차이나타운은 이미 미국사람이 우리보다 먼저 알고 지옥이라고 하였다. 병신을 만드는 아편연이오 거지를 만드는 노름판이오 파락호를 만드는 매음굴이니 ……

마귀로다. 차이나타운을 끊을지어다.

◈ 1917. 3. 15: 스탁톤 도박 박멸안-지방 경찰관 홀프씨는 범죄의 대부분 원인이 도박으로부터 생긴다 하여 도박에 대한 엄중한 법례 제정의견을 발표하여 시에서 조례를 제정

◈ 1917. 3. 22: 삭도지방 자치경찰원을 김찬일씨로 정하고 경무본소에 한인자치경찰 청원서를 제출하여 한인치안에 관한 사항을 교섭하는 중 이라더라.

◈ 1917. 5. 17: 스탁톤의 박영오는 합스농장의 도급을 맡고 농장주에게 돈을 얻어 고국에 여자에게 선표(배삯)를 보내고 신한민보에 배 광고만 찾아보아 마음 조이고 손꼽아 기다리던 때에 불량한 술친구 김영호의 총에 맞아 죽었는데 김영호는 9일 법정에 초심을 받았다.

(스탁톤 감옥에 갇혀있던 김영호는 수염 깎는 칼로 감옥에서 7월8일 자살했다.)

◈ 1917. 5. 24: 스탠포드 26차 졸업생 4백 29인인데 의학박사 22인, 철학박사 6인이었다.

◈ 1917. 5. 24: 재미 한인은 매일 2원 50전 내지 3원 4원을 받는데 한국 돈으로 5원 6원 8원이오 한 달이면 2백 원으로 각도 지방관에 비길 수 있으므로 저축을 못하는 사람은 내지 동포의 가난을 생각치 않는 사람이다.

◈ 1917. 6. 7: 상항 장정 등록 발표-등록자 전수는 6만인데 합격자는 5천

◈ 1917. 9. 13: 스탁톤 부근에 재류하는 동포 17인은 부인전도회를 위하여 많은 연조를 기부하였음으로 동 부인회는 매우 감사히 여긴다더라.

◈ 1917. 11. 8: 새로 제정한 전시 과세법-11월 2일 이후 우편물은 시내편지 2전, 시외는 3전 엽서는 어디든지 2전.

◈ 1917. 11. 15: 상항 술집은 점점 감소-2년 전 2천100호, 본년 6월에는 1천826호, 현재에는 1천768호.

◈ 1917. 11. 22: 샌프란시스코 ‘써던 퍼시픽’철도회사와 오클랜드 나룻배 ‘키우릿’륜선회사의 전차비와 선세 증가 교섭-선세는 한 달에 3원에서 5원, 낫당은 10전에서 15전.

오클랜드 각처의 차비는 6전으로 키우릿 회사는 6전짜리 백동전 주조를 청원함

◈ 1918. 1. 31: 상항 일본인회는 자기네 영사관의 지령을 받아 상항 체류 조선인을 조사하였다. 남자 230인, 여자 25인, 남아 19인, 여아 20인.

◈ 1918. 3. 14: 새크라멘토 리경애, 김석은, 권영복 3부인이 지방회 통상회 국민회에 입회하여 일시 동등권을 누리고 밖으로 국가사업을 돕는 가히 공경할 만한 일이오.

◈ 1918. 3. 21: 본국편지에 돈 넣지 마시오. 검열되면 압수.

◈ 1918. 3. 21: 멕시코 메리다 대한국민회지방회는 개량 혼인법을 발표 (결혼 연령을 남자는 18세 이상, 여자는 16세 이상으로 하고 국민회의 혼인증서를 얻은 후에 결혼할 것 등의 법)

◈ 1918. 4. 4: 근일 상항의 거리마다 전시상황이 팽창하여 마켓 St.에 해륙군대의 행렬.

◈ 1918. 5. 24: 본항 한인 교우의 하루 소풍-“샌프란시스코 한인교우는 골든게이트 녹림방초에 야외예배를 행하고 점심과 운동 유희를 하고 석양에 돌아왔다.”

◈ 1918. 8. 8: 전시의 미국은 사탕 절용 법규를 제정 실시하였다. 캘리포니아의 사탕 생산량이 평년보다 1천300만 파운드가 부족하게 되자 새크라멘토 사탕감독관은 8월1일 부터 한 주일 동안 상오 9시 반부터 4시 반까지 K St.에서 사탕카드를 주는데 카드를 받지 못하면 이 달에는 사탕을 살수가 없다. (코피 맛은 점점 쓰다- 8월 1일부터 매 사람 당 한 달에 두 파운드를 쓸 수 있다. 각 요리점은 아흔 번 식사에 두 파운드를 나누어 써야한다.)

◈ 1918. 8. 22: 지난 1일부터 전쟁으로 인한 전기 절용 명령에 의하여 각 상점은 밤에 전기를 철폐하고 마켓 St.에도 드문드문 전등이 서게 되어 광채 찬란하던 샌프란시스코는 컴컴하기 짝이 없다.

◈ 1918. 8. 22: 일반 외국인이 외국으로 나갈 때는 미국 여행권을 휴대하기로 9월 15일부터 실시된다. 그러면 우리 동포는 이제 일본 영사관 출입을 할 필요가 없다.

◈ 1918. 8.29: 맥스웰 근처에 계신 여러분께-“윌로우스 맥스웰 윌리암스 콜루사 각처에 헤어져 계신 여러분께 고하옵나니 8월 29일은 국치기념일인줄을 여러분이 임의 아시는 바 이곳은 한곳에 모여서 이 욕된 날을 기념하기가 심히 어려운 곳인데 이번에는 특별히 용진 분투하는 맘으로 같이 모여서 궂은 일을 함께 지내기를 바라나이다. 자동차가 있는 10여 동포가 운전을 해 줄 것이다 (시간은 하오 5시30분에 장소는 김종림씨 사택으로) 임시위원 윤응호, 최능익

◈ 1918. 9. 5: 미주에 다년간 유하든 리창셔씨는 지금 60세여 세로 노년으로 친척도 없다.

구제할 방침은 연조를 구하니 …… 환국케 하거나 양로원에 입원시키도록 할 것이다.

1020 3rd St. 새크라멘토 수전위원(모금위원) 리옥형

◈ 1918. 11. 21: 신한민보 창간 13주년 기념 연설-“1906년 상항의 대지진을 만나 석판이나마 인쇄 기구를 불 속에 묻고 겨우 오클랜드로 건너가서 속사판으로 서너 호를 출판하여 겨우 우리 동포의 조난소식을 전하니 본보의 당한 경우가 동정을 재촉하였다. 광무 11년 4월부터 오클랜드에서 활자신문을 발행하다 동년 6월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들어왔다.”

◈ 1918. 12. 5: 북미 총회는 중앙총회의 훈시를 받들어 각처에 수전위원(돈 걷는 의원)을 파견하였는데 캘리포니아를 세 길로 나누어 새크라멘토로부터 각 벼농장에는 총회장 이대위씨, 맨티카와 다뉴바에는 김성권씨, 스탁톤 트레이씨에는 김영훈씨를 파견.

◈ 1919. 8. 28: 8월28일 새크라멘토 지방회에서는 상의원 스팬서, 매코믹 양씨에게 전보를 보내 그들의 한국을 위하여 말한 일을 감사하였다.

◈ 1919. 10. 16: 구미위원부위원 김규식박사가 샌프란시스코 국민회관에서 시국에 대한 의견을 말하고 국민회가 협력하여 공채와 애국금을 실행하라고 하였다.

◈ 1924: 북가주 스탠포드의과에서 수업하는 한영대는 특대실험생으로서 수년동안 황백흑 3인종의 혈액을 연구하더니 금 5월초에 황인의 혈장을 백인의 혈맥에 주사하여 병증을 완전 치료하여 실험의 효과를 성공하였다.

◈ 1936. 11. 14: (The Korean Student Bulletin 기사)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다리 기념식에서 한국 사람들이 상을 탔다.

◈ 1941. 4. 20: 호놀룰루에서 한족대회를 열고 ‘재미한족연합회’조직

◈ 1941. 12. 12: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경에서 대일 선전을 포고하고 민주주의 국가 연합 전선에 참가하는 통고문을 미, 영, 중, 소 4개국에 보냈다.

◈ 1942. 4. 16: 국민청년부는 예년과 같이 상항에서 대회를 소집하여 각 지부대표와 2세 청년 56명이 모였다.

◈ 1942. 6. 25: 상항 오클랜드 재류 한인은 노인 어린이까지 백 여인에 불과하고 이번 맥아더일 경축에 50여인이 참가하였는데 이는 상항 오클랜드 한인의 총동원이다.

◈ 1942. 7. 9: 상항 재류 한인은 7월 7일 상항 재류 중국인이 항전 5주년 기념행렬을 거행할 때에 제5위로 참가하였고 그 참가 상황은 통신을 기다려 게재할 터이다.

◈ 1942. 8. 13: 상항 오클랜드 한인 경위대는 그동안 완전 조직이 되어 27인에 달하였고 매 일요일 하오 2시로부터 4시, 수요일 하오 8시로부터 10시 매주일 2차씩 상항 군장고 ‘아모리 홀’에서 훈련을 받으며 소유 군인이 지장인을 찍어 가주 경위군 사령부로 보내어 군적에 등록하는 동시 한인 경위대 관허장 청원서를 가주 정부에 제출하였고 불원간 허장이 나오면 상항 오클랜드 한인경위대 또한 무장을 갖추어 가지고 나성 한인경위대와 보조를 같이 할터이라고 한다. 남가주 맹호와 북가주 맹호가 합치면 그 성세가 더욱 커지겠고 여호 무리는 더욱 전율할 터이다.

1942년 8월 29일 로스앤젤레스 시청 앞 현기식 장면

◈ 1942. 9. 3: 상항 한인이 28인이 현기식에 참가한 것은 상항한인의 총동원으로 볼 수 있고 사업하는 이는 일주일 혹 2,3일씩 문을 닫고 온 것은 원수가 떼어 내린 우리 국기가 나성 시정청에 오르는 것을 보기 위하여 수일 영업의 이익을 희생한 것이라고 한다.

◈ 1942. 9. 17: 재미한족연합회는 8.29 로스앤젤레스 시청에 태극기를 거는 현기식에 참석한 각 지방 동포를 위한 환영만찬회를 열었다.

상항 통신원 김동우씨의 연설 “상항, 오클랜드 재류동포는 이번에 나성에 와서 현기식을 보고 몹시 기뻐합니다. 우리 2천3백만 동포가 오늘 국기 단 것을 알 것 같으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또 순국한 선열의 영혼이 오늘 국기 단 것을 알 것 같으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금일 현기식 거행은 생사에 다 같이 느끼는 일이올시다. 이왕에는 우리가 반기를 달고 국치를 기념하였지만은 오늘부터 우리는 국기를 달고 국치를 씻기로 결심합시다.”

◈ 1942. 10. 1: 상항시 당국은 공습을 피하고 차를 파킹하는 곳으로 쓰기 위하여 유니온 스퀘어 땅 아래 150만원 경비와 1년 시간을 들여 방공굴을 기착하는 준공을 하였다. 9월22일 하오 2시 승전위원회 주최로 낙성식 거행에 국민회 상항지방회에서는 청첩을 받았다. 차부인 에다여사와 백부인 캐더린여사와 김앨리스여사로 하여금 한국 옷을 입고 참가케하여 관중의 박수환영을 받았다 하더라

◈ 1943. 2. 18: 우리나라의 국화는 무궁화요 끝없이 계속하여 핌으로써 무궁화라고 한다.

◈ 1943. 2. 25: 북가주 상항 오클랜드에 있는 한국부인전도회는 한국광복군을 위로하기 위해 200여 원 위로금을 모아 중경으로 가는 선편에 보내 광복군 사령부에 드릴 예정이다.

◈ 1943. 12. 23(북미시보): 북가주 한인시국대회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었다. 진주만 습격이후에 북가주에 있는 한인단체는 11월 12일 상항감리교회당에서 시국대회를 개최하였다.

◈ 1946. 4. 27: 북가주 맨티카는 천여 에이커에 사탕무우 농작으로 우리동포 60여인이 집합한 큰 부락이라. 근일 교회와 국어학교를 창설하고 30여인이 국민회 정신을 받들어 임시명의로 지방회를 설립하기로 작정하였다. 북미 총회에서는 4월 2일 지방회의 설립의 인준장을 발급하였다.

◈ 1946. 10. 24: 재미 상업회의소 상무부에서 남, 북가주에 방문하여 상업회의소에 존재를 알리고 박영섭, 한규동, 강영문을 월간 ‘블레틴’책임을 맡겼다.

◈ 1946. 11. 14: 오클랜드에 김은혜는 3833 텔레그래프 애비뉴 3층 가옥을 5만2천500원을 주고 사서 영업을 하고 리치원은 제5가에 있는 집을 5천원을 주고 사서 이사하였다.

◈ 1946. 12. 19: 최근에 돌아온 연합회대표 송종익, 김병연 양씨는 북가주 동포에게 고국 사정을 전달하기 위하여 12월27일 나성을 떠나, 송종익씨는 딜레노로 다녀오겠고 김병연씨는 그로부터 상항, 오클랜드, 새크라멘토, 스탁톤, 월넛그로부와 기타 지역을 심방할 예정이다.

◈ 1948. 2. 19: 상항에 사는 하희옥씨는 안영호씨와 그 빙모 김자혜가 경영하는 오클랜드 아파트로 이사하였다.

◈ 1948. 3. 11: 하와이 호놀룰루에 사는 정두옥씨는 동부인하여 샌프란시스코에 왔다. 아들 정남기하사가 작년 5월 전경무, 이한식과 같이 김포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로 오는 길에 동경부근 부사산에서 조난하여 정남기하사와 조난한 군인 10 명의 유해를 샌프란시스코로 운구하여 2월25일 산

부르노 군인 매장지에 안장하는 예식에 참여한 뒤 정부인은 동화의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 1948. 11. 4: 상항 부근 마운틴비우에 이사한 류일한씨 동부인은 새집으로 이사하여 온 후 일반 친우들과 기쁨을 같이하기 위하여 10월17일 하오3시부터 동 7시까지 하우스워밍파티를 개최하고 상항재류동포와 백인 친우를 요청하여 연향을 같이 하였는데 당시 참석한 인사가 50, 60인에 달하여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더라.

◈ 1948. 11. 25: 미주에 7년 이상 거주한 분은 영주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주권을 얻기 원하시는 분은 중앙 상무부 총무 최진하씨에게 문의하시기 바람니다. 중앙상무부

◈ 1948. 12. 16: 한국정부대표 민희식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체류한인이 600명이 되는 로스앤젤레스에 영사관을 개설하고 120명이 되는 샌프란시스코에는 부 영사관을 개설한다고 발표했다.

◈ 1948. 12. 30: 미국은 남한정부 부흥 비용으로 1억 2천500 만원을 지출한다고 하였다.

◈ 1951. 4. 25: 가주 고등법원에서 1913년 5월부터 32년간 내려오던 외국인 배척하는 토지법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을 내렸다.

◈ 1953. 5. 2: 한국의 날로 지정하고 전 미국에서 한국전쟁에 피해자를 위하여 의복과 기타 구조 물품을 소집하였는데 각 신문의 광고와 라디오, 텔레비전의 방송과 각 도시 시장이 수포고하고 확인하여 수천만 달러 가격의 물품을 수합하여 한국에 우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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