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초기 한인교회 역사: 믿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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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한인교회는 1903년 하와이에 온 첫 이민들에 의해 시작됐다. 죤스 목사의 권유처럼 하와이 이민 자체가 주한 미 선교사들이 자신이 담당한 교회 신도들에게 권유함으로 시작된 것이므로, 어떻게 보면 교회가 이민을 시작한 셈이었다.

하와이 초기 이민은 기독교가 성했던 평안도지방에서 많이 왔다. 도시에 살았지만 가난하고 소외당한 계층들은 서구 문명에 대한 동경심으로도 기독교를 쉽게 받아들이며 믿어야 사는 줄로 믿었다. 1903년에만 하와이에 온 한인들 중에 본국서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 4백여 명에 이르렀으며 전도사가 30여명이었다. 이들은 향후 2,3년간 이민 온 8천여 명의 한인들에게 열렬히 복음을 전했다.

하와이 도착한지 6개월 만인 1903년 7월 4일 김이제전도사의 인도로 목골리아 사탕수수농장에서 첫 예배가 열렸다. 같은 해 11월 10일 하와이 호놀룰루 시에 홍승하 목사가 최초의 한인교회를 설립했다. 교회는 고된 노동 속에 지낸 한인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같은 언어를 가지고 두고 온 고향을 그리며 서로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또 교회는 이런 특수한 이민사회에서의 사명을 십분 깨달아, 한국어, 역사, 무용 민요, 미술 등 전통문화를 2세들에게 가르치는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했다.

을사보호조약과 한일 합방을 계기로 망명객과 유학생들이 미국에 다수 들어왔다. 이들은 한인사회의 지도자적 역할을 감당하느라 애썼다. 그러나 순수 교회의 역할과 조국 독립운동의 구분이 없었고 지도자들 간에 독립운동의 노선도 각각 달라, 교회 내에서 혼선과 갈등을 빚어 교회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대립이 심한 경우에는 교인들 간에 난투극이 벌어져 경찰이 출동하고 심지어 법정소송까지 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여전히 한인사회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고. 그 독특한 결속력으로 교육과 문화 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1903년부터 1950년대까지 15개의 교회가 캘리포니아 주 안에 섰는데 노동인구의 이동이나 분열 등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10개 교회가 없어져 5개 교회만이 남게 됐다.

조국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각 교회는 이를 위한 모금에 앞장서게 된다. 그 명칭은 애국금, 혈성금, 국민부담금, 독립금 등으로 교회마다 각기 다르게 불렀다. 교인들은 교회 헌금 외에도 거의 의무적으로 노동 임금의 다소를 조국광복을 위해 희사했다. 상해임시정부의 자금은 거의 미주 한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03년 교회가 선 이후 1945년 조국에 광복이 올 때까지 미주지역 한인교회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모은 자금이 300만 달러를 초과했으리라고 보고 있다. 이처럼 초기 한인 교회는 한인들의 안식처이며 독립운동의 요람지였다. 또한 교회에 모인 한인들은 서로 소식을 나누고 미국사회와 연결되는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상항 한국인연합감리교회

(San Francisco Korean United Methodist Church)

1903년 9월 23일 안창호, 이대위 등 10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렸다. 이들은 망명인, 유학생, 인삼상인 등 다양한 신분의 한인들이었다. 당시의 샌프란시스코에는 25명 정도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1904년 4월 18일 대지진이 발생하자 교회 선교부의 주선으로 교인들은 오클랜드에 집을 얻어 합숙했다. 1904년 9월 5일 도산 안창호는 한인의 단결과 친선을 위해 친목회를 만들어 한인끼리 서로 연결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각 가정을 순회하며 예배를 하였는데 1905년 10월 8일에 이르러서는 한인전도회를 조직하게 된다. 문경호 전도사의 인도로 예배를 시작하여 Ellis St에서 주말마다 예배가 계속 되었고 교인은 약 50명이 되었다.

전명운, 장인환, 최정익, 김성권, 전성덕, 문양목, 정재관, 정원도, 박윤화, 장나득, 윤혁, 하상옥, 조성학, 김성모, 허승원, 임치정, 문경호, 방화중, 이강 등이 초창기 교인들이었다. 1906년 1월 7일에 5명이 침례를 받았다. 1906년 6월에 감리교단에 가입하고 방화중전도사가 담임했다. 그 후 동부 행 학업을 연기하고 동포 구호, 계몽, 전도 사업에 헌신한 양주삼 전도사가 교회를 맡게 되는데, 그는 이 덕 목사와 남감리교회 선교부 감리사 액튼 목사의 협조를 얻어 정식으로 1906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 한국인 감리교회를 설립한다.

상항 한인 감리교회 초기 교인들 1915년 8월 1일

교회 위치는 2350 California St 에 있는 삼층 개인주택을 빌려서 1층은 식당으로 2층은 예배와 3층은 교인들의 숙소로 정했다. 그곳에서 밤에는 영어를 가르치며 친교와 전도의 장소로 사용했고 25여 명의 한국인이 모였다. 1907년 10월에 교회를 2123 Bush St. 3층 주택 건물로 이전했다.

1908년 3월 23일 교인인 장인환과 전명운이 스티븐스를 저격 암살하였다. 교회에서 독실하고 모범된 품성을 보여 온 장인환과 전명운의 애국적 행동은, 이 교회를 창립초기부터 구국과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만들었다.

1907년 7월 13일 ‘한인연합교보’를 발행하던 것을 1908년 12월 20일 그 체제와 명칭을 바꾸어 월간잡지 ‘대도’를 창간하였다. 미주와 본국에 있는 교우와 동포를 위한 잡지로 미주에서 한글로 발행된 첫 발간물이 됐다. 매월 정기적으로 간행하여 전도, 교양, 고국소식을 전했다. 잡지가 항일사상 고취에 중점을 두자 선교부에서는 그 내용이 지나치다고 반대했다. 재정곤란으로 정간하게 됐다.

이 잡지의 주필은 양주삼, 윤병구, 이대위가 역임했다. 대한인국민회 회장직도 겸하고 있던 이대위 목사는 1915년 2월 4일 1053 Oak st.에 위치한 대한인국민회 소유 3층 건물의 아래층을 예배당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 후 자체교회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자 부인선교회에서는 교회건축운동을 시작하였다. 마침내 1930년 6월 1일 1123 Powell St.에 교인들의 헌금과 선교부의 보조금으로 교회건축이 완공됐다. 헌당식에는 200여명의 교인과 일반 한인들이 모여 감격적인 순간을 맞았다.

1940년대 북가주에 거주하던 동포들은 미군에 입대를 하였는데 상항감리교회에서는 6명이 징집에 응했다. 1959년 감리교 태평양 선교연회 재단법인에 소속되었던 본 교회를 독립재단 법인으로 등록키로 결정하고 감리교회 캘리포니아 네바다 연회의 동의를 얻었다. 1959년 9월 19일 재단법인 샌프란시스코 한국인 감리교회로 명의변경 등기신청을 제출했다. 이 신청이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승인을 얻어 1960년 4월 14일 한국인감리교회 명의로 변경되어 정식 등록되었다. 이와 동시에 본교회의 재산 소유권이 태평양선교연회재단에서 본교회로 이전되었다. 1968년 9월 교회 명을 상항한국인 감리교회로부터 ‘상항한국인 연합감리교회’로 변경했다. 1994년 5월15일에 3030 Judah St. San Francisco, CA 94122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교단 선교부의 보조금과 교인들의 헌금으로 세운 이 교회는, 샌프란시스코와 근교 한인들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감당했으며 이민의 거처가 되기도 했다.

역대 교역자는 양주삼 전도사(1906-09), 윤병구 전도사(1909-10), 이대위 목사(1910-28), 황사선 목사(1928-42), 김하태 목사(1942-45), 임두화 목사(1945-48), 양주은 전도사(1948-49), 김하태 목사(1949-53), 안병주 목사(1953-60), 송정률 목사(1960-77), 차원태 목사(1977-88), 유석종 목사(1988-99), 박한규 목사(1999-2001), 김진호 목사(2001-2003), 김택규 목사(2003-현재) 등이다.

◈ 1907년 공립신보에는 매번 교회 광고가 났다. “본 회당에서 매 예배일 오후 두 시에 반 예배회로 모이며 밤 여덟 시에는 청년회로 모이며 매 예배 3일 저녁 여덟 시에는 기도회로 모이고 예배 1일 2일 4일 5일 저녁마다 야학을 시키며 또 회당 안에서 교우의 유숙도 편리케 하오니 한인동포는 조량하시옵. 상항한인회당 감독 리덕 양주삼 고백 2350 California St. 샌프란시스코”

◈ 1912년 3월 대도(교회 월보): 스탁톤 허리상점의 주인 허승원, 리순기 양씨는 본교회 전도비에 대하여 매삭(매달) 2원50전씩 내기로 작정하였으니 감사하다.

1930년 유학차 도미한 안익태를 위한 환영회를 연 상항감리교회

오클랜드 한인(연합)감리교회

1914년 6월 5일 조성학, 문원칠 두 사람의 주선으로 문원칠의 집에서 당시 남감리교 순회목사인 황사영목사 인도로 첫 예배를 보았다. 그러나 1912년 3월 상항한인감리교회 월간지 ‘대도’에는 “본 교회 청년회에서 전도하는 일에 대하여 오클랜드감리교회청년회에서 매삭 2원50전씩과 부인회에서 64전을 보내었으니 그 열성을 감사하노라”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미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문원칠은 7가와 8가 사이의 웹스터 길에서 작은 식료품상을 하고 있었다. 개인집도 달린 이 상점에서 예배를 보았던 것이다. 당시 남감리교 순행목사였던 황사영목사는 1912년부터 새크라멘토, 스탁톤, 걸트, 멘티카, 로스엔젤레스, 멕시코등을 순회하며 전도하고 있었다.

1914년 오클랜드에 세워진 오클랜드 감리교회

1917년에는 태평양 신학교에서 수학 중이던 임정구 전도사를 교역자로 청빙하여 목회를 하게 하고 예배처소를 조성학의 개인 집으로 옮겨 이 장소에서 6년간 예배를 드렸다. 1922년 2월8일 전도사 임정구의 주택으로 예배소가 이전했는데 이때 교인이 20여명에 달해 교회 설립의 기초가 되었다. 전도사 임정구는 1929년 감리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29년 1월에는 남감리교 선교부와 교섭을 벌여 3월2일 감회사 데이빗의 주례로 임정구목사와 노신태전도사를 택하여 교회를 설립했다. 오클랜드 한인감리교회는 남감리교회에 정식으로 소속된 교회로 발전했다. 임정구 목사는 54세를 일기로 1939년 작고하기까지 22년간 시무했으며 그의 딸 캐더린 임은 11년간 교회 반주자로 봉사했다.

임정구 목사 이후에는 거의 매년 담임 목회자의 이동이 있었다. 박용학 목사는 2차 대전 당시 두 번이나 군대 징집을 당했고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 감리교회에서 목사와 부목사를 하던 김창수 목사는 사병으로 입대하였다가 나중에 군의관이 되어 한국에까지 갔다. 해방되던 해 임두화 목사가 동 교회에 약 일 년 간 있었다. 그러나 후에는 몇 년간 목회자가 없었던 공백 기간이 왔다. 다음에 부임한 이진묵 목사는 태평양 신학교 학생 목사로서 특히 새크라멘토 선교활동에 열심을 다하여서 교인 중 많은 이가 새크라멘토에서 농사일을 주업으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1938년 웹스터가에 집 한 채를 얻고 완전한 예배당을 갖추어 그해 12월20일 헌당식을 거행하니 이것이 처음으로 갖게 된 교회당이었다. 1941년 7월에는 520 해리슨 St.로 이전해 전성기를 이룬다. 그 장소는 2차 대전 당시 일본인 주인이 강제 수용되는 바람에 건물이 빈 일본인 감리교회였다.

◈ 1948. 3. 11 신한민보: 오클랜드 한인목사 주택중수 경비결산.

“오클랜드 한인목사 주택중수 경비는 총계 1만 5백 22원 50전인데 그 가운데 감리교 총회에서 5천 원을 주고 담보액 5천 5백 22원 50전 중 2천 8백 22원 50전은 교인들이 헌금으로 모아 내고 2천 7백 원은 매삭(매달) 50원 변리 22전씩 더해서 갚기로 하였다.”

그 교회를 1950년 주정부가 고속도로 확대방침에 의해 2만 4천 달러에 매입하겠다는 의향을 보인 기록이 있는데 실제로는 얼마에 매매가 이뤄졌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1951년에는 359맥아더 블루버드에 건물을 구입하여 헌당식을 가졌다. 교인 수는 많을 때는 70명, 적을 때는 12명에 불과했다. 1959년에는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 후 3525 Kansas St.에 있는 다른 교회를 빌려 쓰다가 1984년 6월27일 현재의 자리 737 East 17th St에 있는 교회를 55만 달러에 구입하여 8월5일 입당 예배를 드렸다. 8월12일 주일에는 창립70주년 기념예배를 보았다.

도산 안창호의 사촌인 안영호와 부인 안조앤은 교회를 위하여 많은 일을 했다. 교회여성회 활동이 특히 활발했다. 회원들은 1달러에서 7달러50센트까지 특별회비를 냈다. 교회의 재정이 어려울 때는 백인교회, 중국교회, 필리핀교회 등에 만두를 만들어 팔아 재원을 마련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으로 옷과 선교기금을 꾸준히 보내기도 했다.

◈ 1946. 12. 5: 수입-독립금(120원) 의무금(112원 50전) 신문대금(30원)보조금(75원) 국민회창립 기념금(16원 50전) 3.1금(28원) 낸디 난민구제금(53원) 큐바동포 구제금(30원) 오클랜드 적십자 지부 의연금(20원) 인구세(11원) 임창영 박사의 교육회의연금(26원) 상조금(12원) 이상 합계 534원 지출-534원

1948년 4월 25일 열린 여성회 모금 디너에는 상항감리교회가 $15, 양주은 부인 $15, 오클랜드 중국교회 $19.50, E. H. Kim $58, 안조앤 $36, Helen Kim $34.50 등의 기부금이 있어 총 238달러85센트가 모금됐다. 당시 은행구좌는 Bank of America에 있었고, 여성회가 모일 때면 10명에서 16명의 회원이 참석했다. 재무는 안조앤이 맡았다는 기록이다.

역대 시무 목사는 황사용 목사(1914-17) 임정구 목사(1917-39) 이진묵 목사(1940-41) 장기형목사(1941-42) 박용학 목사(1941-42) 김창수 목사(1942-43 상항 부목사 겸직) 박용학 목사(1943-44) 김태묵 목사(1944-45) 임두화 목사(1945-46) 이진묵 목사, 장기형목사, 김창수 목사(1947-1971) 천병욱 목사(1971-1972) 김광진 목사(1973-1988) 김종원 목사(1988-1999) 김현일 목사(1999-2001) 김무영 목사(2001-현) 등이다.

현재 교회주소 737 E. 17Th St. Okland, Ca 94606

새크라멘토(삭도라고 부름) 한인교회

1907년 10월 11일자 공립신보는 “새크라멘토에 공립관이 신설되자 상항한인회당 전도사 양주삼씨가 공립회관 안에 한방은 미순으로 정하고 매 예배일에 예배를 행하며 전도케 하겠다고 하니 우리 한인사회에 좋은 일이더라”라고 새크라멘토 교회의 시작을 알렸다.

10월 18일 기사에는 “금월 13일 오후3시에 처음으로 미순에서 예배를 행하였는데 한인 참석한 이가 20인이오 미국 손님이 18인이며 감독 리덕박사가 요한복음 15장 4절 뜻으로 영어강도하고 전도사 양주삼씨가 한어로 번역하매 전회가 대단히 감동하였으며 감리교회 부인전도회 회장되는 부인도 기쁜 것을 표하여 연설하였다 하며 불구의 한인 전도사도 책정하며 야학도 실시한다는데 아직은 정인표 김유택 양씨가 전도한다더라”고 적었다.

◈ 1907. 11. 8: 새크라멘토 한인 교회당에 야학을 설치하고 서양교사를 청하여 영어와 작문을 교수한다더라.

◈ 삭도에 전도-본월 4일 주일에 본 교회 목사 이대위씨가 쌔크라멘토에 리응목씨의 려관에서 동포들을 모으고 전도하였는데 장차도 매주일 모이기로 정하였다더라.(1912년 2월 대도)

◈ 1913. 7. 13: 새크라멘토에 있는 우리 동포들은 날로 도덕심이 배양하여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점점 늘어가며 매주일 오후에 모여 예배를 보고 주일날 밤마다 토론하며 예배 3일 밤은 성경을 공부하는데 재미가 많다더라.

◈ 1914. 7. 16: 새크라멘토에 잇는 동포들은 교회를 더욱 확장하고자 지난달 마지막 주일에 연조를 모집하였는데 재정이 87원 50전에 달하였고 당일 세례를 받은 사람이 많다 하더라.

◈ 1917. 12. 6: 삭도 한인 예배당 감사일 예식을 거행.

“삭도통신에 의하면 한인예배당은 지난달 29일 하오 7시30분에 감사 기도와 예식을 거행하였다 1.기도-주석 이인신 2.기도-김홍균 3.독창-감사가(이부인남조) 4.연설-최능익 5.합창-여학생 양제희 김요한 6.연설-누구나 7.독창-사덕순 8.폐식.

삭도 한인기념 예식은 금년이 처음인데 겸하여 금년 같은 예 없는 대풍작을 얻었음으로 당일 출석한 남녀동포 50인은 예식의 순서를 마친 후에 다과를 나누며 여흥의 연극을 꾸며 매우 재미로운 성황을 보였다더라.”

Stockton(스탁톤) 한인감리교 미션

상항감리교회 월간잡지 ‘대도’1912년 2월자에는 ‘스탁톤 전도서’라는 기사를 실었다. “1912년 1월 21일 주일에 본 교당 청년회전도국장 강영소씨가 스탁톤에 거주하는 동포에게 전도하는 일을 시작하였으며 신성원씨의 여관으로 예배소를 삼았는데 전도의 재미를 많이 보았고 장차도 매주일 모이기로 정하였다더라.”

스탁톤 거주 한인들이 1924년 10월 콜로라도가의 한 건물을 사서 미주에서 첫 번째로 한인 자체교회 예배당을 설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해 11월 5일 김탁 목사의 주도로 헌당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한인들이 노동조건과 형편에 따라 다른 지방으로 이동하게 되자 교인이 없어져 1936년 2월 미션을 폐지하였다. 이때 예배당 건물을 팔아 딜라노 예배당 건축비로 기부했다.

마운틴 비유 감리교회

마운틴 비유교회가 언제 설립되었다는 것은 찾을 수 없었으나 교회모임에 참석하였던 기록으로 이미 1915년에 마운틴비유에 교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1915. 8. 19: 교회광고-한인감리교회의 계삭회 일자는 다음과 같음

삭도(8월 29일) 스탁톤교회(9월 19일) 마운틴 비유(9월 26일) 오클랜드 교회 (10월 3일) 상항교회 (10월 10일) 장로사 윌리엄 액톤 근계 (년환회 10월 13일)

Manteca(맨티카) 한인감리교 미션

1916년 2월 22일 신한민보에 의하면 맨티카에 교회를 세우는 예식이 있었다. ‘2월12일 예식거행 교우 60여인 참여’라는 제목하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사탕무 농사로 인하여 60여명이 모인 큰 부락인데 그들은 거의 다 일찍이 계명을 받은 교인이라 복음전파에 몸을 바친 전도사 황사용씨가 감리교회 지방교회를 설립하고 2월 12일에 개막식을 거행하였으니 이는 맨티카 지방에 처음 되는 좋은 일이라 스탁톤 부근 동포와 상항 한인목사 이대위씨와 북미 총회장 강영소씨는 청첩을 받아 그 예식에 참여했다.

1916년 맨티카 지방 전도사 황사용씨는 산호제 시중에 모인 연 환회에서 목사로 승등되어 맨티카 교우전체는 10월 25일 하오 7시 반에 황목사 환영회를 열었다. 남녀교우 60여인이 출석하였다. 1917년 10월 2일에는 감리교 미션을 설립하고 예배당을 설비하였고 맨티카 예배당 건축 수전의원 최능익씨는 상항한인예배당에서 75원 연금을 모집하였다.”

1917년 12월 6일 ‘맨티카 예배당 건축 준비’라는 제하의 기사

“김경보씨는 광 25척, 땅 1백 척을 십 년 한정으로 기부하고 또 식수까지 공급하여 백 명은 넉넉히 들어가는 큰 예배당을 곧 짓는다. 경비는 6백 원이 들며 건축위원회 임원은 건축비중 3백 원이 모집되기를 기다려 공사에 착수할 것이다. 지난 달 25일 예배 후에 2백여 원의 연금을 모집하였고 총 교회 감사도 얼마 돕기를 허락하였다. 북가주 한인이 공동으로 세우는 집은 맨티카 한인 예배당 건축이 처음이니 북가주에 거류하는 일반은 다 같이 동정을 기우리라. 회계는 김원택과 김필권이고 수전의원은 최능익이라 하더라.”

1918년 9월22일 헌당식을 가졌으며 황사용 목사의 주례로 5년 동안 예배하였다. 맨티카에 세운 한인교회는 북가주 한인들이 힘을 모아 직접 건축한 최초의 건물이다.

1916년 세워진 맨티카 한인감리교회

기타 교회 관련기사

◈ 한인연합교회보 발간지 취지서 (1907년 7월 19일 공립신보)

“(중략)단체가 있는 대로 각각 회보를 발간하여 서로 교통하며 서로 합동하며 서로 연구하여 경쟁하는 시대에 능히 걸음을 같이하여 나아가 복락을 도모하는 고로 신문과 잡지를 대왕같이 존귀히 여기며 사부같이 사모하며 음식 보담 더 소중히 여기며 한때 밥을 거르더라도 신문은 거르지 못하느니 교회 또한 그러한지라 미국에 있는 모든 교회를 보면 각 교회 연합보가 있으며 총회에 총회보가 있고 각 예배당에 일보와 월보가 있어 천하가 한집 같고 만리가 지척 같은지라 …… 슬프도다 미국에 있는 우리 대한인 교회는 그렇지 못하도다. 교당이 34처에 널려있고 교인이 4백 명이 되는데 일폭만한 기관보가 없어 서로 교통함이 막히며 서로 권위함이 결핍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할 뿐 아니라 ……

본보를 위하여 의연금을 낼 분은 상항회당 전도사 양주삼씨와 방화중씨에게로 송금할 것.

본보 임시 사무소는 상항한인교회당내 로 정함. 1909년 7월 13일 발기인

장로교회 조사 방화중, 감리교회 전도사 양주삼, 미이미교회 전속당 이정래

한인련합교보임시사무소 2350 California St. San Francisco, Callifornia”

◈ 1917. 3. 15 신한민보: 북가주 한인감리교 지방연회가 3월9일 하오 2시30분 샌프란시스코 오크 스트리트 한인 예배당에서 열렸다. 참석자는 감독 램버트 감회사 액톤, 한인목사 이대위 황사용, 지방 전도인 황사선 임정구, 지방대표자 샌프란시스코-박을용 하상옥, 맨티카-최능익 한치홍, 스탁톤-신성원이었다.

◈ 북미한인교회공의회

1917년 12월 27일 중가주 다뉴바 한인 예배당에 모여 북미한인공의회를 조직하였다. 목적은 북미한인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1.전도방침 연구 2. 북미한인교회보 발행 3. 각 교회형편을 공의회에 보고 할 것 4. 각 교회가 매년 1차 이상 사경회를 하기를 권면 5. 각 교회가 재정담당하기를 권면 6. 교인이 이사하면 할 수 있는 대로 통보 7. 미주 교인이 주일 잘 지킬 방침 연구. 1918년 1월 2일 북미한인교회 회장 이대서 서기 한승곤

◈ 미주학생선교회와 미주한인학생원동선교부

1919. 7. 17 기사: 미주학생선교회가 생긴지 1년4개월이 됐다. 이 단체는 국민회 중앙총회와 임시정부 등의 명령과 지도를 좇아 동포의 진상을 세계에 소개하고 각 종교단체에 교섭하여 도덕적 원조를 얻기를 힘쓰는 단체다. 회원의 수는 130명에 달하고 선교회 사무 확장을 위해 캘리포니아 지방 위원은 한승권 목사로 북방을 맡게 하고 차정식씨로 남방을 맡게 했다. 선교회 이름으로 한국독립운동의 자세한 내력과 한국의 현상과 국민회총회의의 주장하는 바를 자세히 기록하여 영문으로 출판하여 각처 선교회와 종교단체로 보내어 이름을 밝히고 동정을 구하며 한국과 한국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편지 5천장을 썼다.

◈ 1942. 10. 8 신한민보: 북가주와 중가주 한인교회주소

Korean Woman’s Missionary Society/1966 San Pablo St. Oakland, CA

Korean M.E. Church/1123 Powell St. San Francisco, CA

Korean M.E. Church/520 Harrison St. Oakland, CA

Korean M.E. Church/P.O.Box 1014 Delano, CA

Korean M.E. Church/P.O.Box 623 Danuba, CA

Korean Presbyterian Church/ 1419 J St. Reedley, CA

타 지역 초기의 교회들

◈ 1903년 11월 3일 홍승하 목사의 인도로 ‘한인전도회’가 호놀룰루에서 정식교회로 발족하니 하와이 한인 감리교회의 시작이었다.

◈ 1905년 2월 10일 호놀룰루에 한인성공회가 창립되었다.

◈ 1906년 초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방화중전도사가 로스앤젤레스에서 마포삼열 목사와 나성에 한인장로교회를 설립하기로 하고 1929년 김중수 목사가 부임함으로 완전한 한인 자치교회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가 시작됐다.

◈ 1915년 5월 16일 산타아나 지역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1915년부터 1917년 까지 노회에 연락하여 리차드 목사의 지도로 설립한 미션이다. 농업 일에 종사하는 이일형이 한인 노동자들을 위해 설치한 캠프 안에 예배당을 차린 형태였는데 홍치범 전도사가 시무 하다가 3년 만에 폐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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