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터전 삼아: 한인농업

Read in English

1917년부터 1919년까지 북 캘리포니아(북가주)에서는 벼농사 경기가 매우 좋아 농사를 짓는 한인들은 상당한 수입을 올렸다. 그곳에서의 농업은 한인들의 생활터전이었고 독립자금의 근원지였다. 하루 10시간 이상 뜨거운 뙤약볕에서 농사를 지어 수고한 보람으로 농업이 기반이 되어 북가주 교포들은 차츰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한인들은 묵묵히 일을 잘하고 품행이 좋아 백인들의 신용을 얻어 그 동안 일인에게 주던 일을 한인에게 넘겨주곤 하였었다.

1920년에는 세 개의 농장도 세워지고 한인들은 자본을 있는 대로 농업에 투자하여 일확천금을 꿈꾸었다. 그러나 1920년에 발생한 대홍수는 북가주 일대의 벼 농장에 엄청난 타격을 가하고 경작하던 벼농사는 한 부대의 수확도 없이 전부 손실되었다.

하루 10시간 이상 땀 흘려 일한 보람도 없이 한인들의 손해는 수십만 달러에 달하게 됐다. 또한 1차 세계대전이후 쌀값 폭락까지 겹쳐 한동안 전성기를 구가하던 한인들이 활발했던 농업 전성기는 영원히 막을 내리게 된다.

신한민보에 나타난 북가주 한인들의 농업 관련 기사

◈ 1912. 3 (대도에 실린 내용): 스탁톤 ‘허・리・상점’은 근일 또 5백여 에이커 되는 농장을 더 얻어 농사를 시작하였다 하니 우리 동포의 사업이 금년에 처음으로 이같이 광장됨에 무한한 희망이다.

◈ 1913. 6. 23: 스탁톤에 김린수 박가현 김기만 리석원씨가 이백여 에이커 감자농사를 하였는데 감자의 결실도 잘 되었고 시세도 좋아 매 박스에 일원씩에 팔았다하니 기쁘다.

◈ 1913. 7. 22: 양권씨의 합스농장-새크라멘토 근방에서 합스따는 일을 주선하는 권사선, 권영태 양씨의 농장에 동포가 50명 가량 모였다.

쏠타나따에서 참외 농사한 박승철씨의 말을 들은즉 금년농사는 지금 필하였는데 순이익이 1천 4백 원가량이라 하더라

◈ 1913. 8. 1: 새크라멘토 등지에 합스(밀보리)밭을 맡아 놓고 동포 50인 가량을 주선하오니 8월 7일 안으로 오시오. 합스 주선인 김윤택 고백. 1511 4Th St. 새크라멘토

◈ 1913. 8.: S.O.Kim과 K.S.Lee가 콜루사 카운티에서 천 달러를 7%의 이자를 주고 빌려 70에이커에 농사를 지었다. 이것이 처음 백인 농장주와 한인이 계약을 맺은 처음 기록이다.

◈ 1913. 9. 26: 콜루사 근방에서 벼농사하는 이두형씨가 상항교회에서 농사지은 벼이삭 몇 개를 보였는데 한국 외에는 제일 잘된 벼와 같아 실업이 흥하기를 바라노라

◈ 1913. 10. 13: 써니베일의 도마도 농작/써니베일 광야에 한없이 널려 일 년 풍작을 자랑하던 도마도가 심한 더위에 말라죽으나 한인의 농작은 큰 손해가 없을 듯하다더라. 써니베일은 농업의 근거지이고 유학생도 많다.

◈ 1914. 4. 9: 장 이 양씨 20에이커의 참외농사

◈ 1914. 7. 23: 본인이 삭도 근경 커스문지방에 금년에 다시 합스따는 도급을 맡아놓고 첨위 동포제위께 미리 알게 하오니 금전에 주의하시는 이는 8월10일 께 일제히 다 오시기를 바라나이다. 합스 주선인 김준화고백 1327 4Th St. 새크라멘토

◈ 1914. 8. 6: Cosumme에서 밭일 할 사람 구하는 광고-박명오, 임치호.

우리 동포의 농업-금년 벼농사 호황 김종림, 마춘봉 등이 7백 에이커에 경작하다.

◈ 1914. 8. 27: 농부의 대 운동-새크라멘토 부근 각 지방에 있는 농부들의 대표자들은 한 단체를 조직하여 8시 동안만 일 시키자는 법률을 반대하기 위하여 장차 본 항에 회집하여 대 운동을 거행할 터인데 본항 큰 거리로 모여 순행할 예정이라더라.

◈ 1914. 11. 12: 메리스빌에서 벼농사하는 이준기가 화재로 집과 재산을 잃다.

◈ 1915. 4. 8: 북가주 월넛그로브 통신에 의하면 30여 동포가 그곳에서 아스파라거스를 묶는 일로 일당은 일원 삼십 전에서 삼 원까지로 아직 할 일이 있다.

마운틴 뷰에 이병호씨는 김성전씨와 함께 20에이커에 도마도를 심고 김원택씨와 김채환씨와 더불어 헤이 250에이커와 사탕무우 50에이커를 심었다.

◈ 1915 5. 13: Biggs의 벼농사/박량래, 최봉술이 160에이커에, 이진섭, 강국보, 임지성등이 90에이커에, 김장연이 320에이커에 경작했다.

◈ 1915. 8. 17: 맨티카에서 13일부터 무우 캐기를 시작하였는데 잘 버는 사람은 매일 5원 이상을 벌 수 있으나 일군이 없어 매우 근심이라 하였더라.

◈ 1916. 2. 22: 가주 맨티카에 사는 한인 60명이 자본금 재산 만여 원으로 1300에이커의 땅을 빌려 사탕무우 재배를 시작했다.

◈ 1916. 6. 23: 윌로우스, 테일로스빌, 우들랜드는 새로 경작하는 땅이라 토지가 비옥하다.

◈ 1916. 8. 10: 가주의 본년 쌀 추수는 84만석에 이른다. 미국 단위로는 4백18만 브쉘로 1브쉘은 우리나라 두말 한 홉 남짓하니 어림컨대 84만석이 된다.

◈ 1916. 8. 17: 맨티카 무 캐기 시작: 잘 벌면 하루 5원

◈ 1916. 9. 21: 스탁톤 감자와 안연(양파)호황. 작년의 3배 경작으로 작년 감자농사에 실패한 교포가 올해 감자농사를 계속하였으면 한 기회를 잡았을 것이다. 감자 1포 1원75 전, 안연양파 1포 1원 50전

◈ 1916. 9. 28: 한인들이 스탁톤에 감자와 써니베일 1년 감에 투자하다가 최근에는 벼, 무, 사탕무, 콩 농사로 이동하여 230에이커를 가졌다. 벼농사로는 재미한인 벼농사의 원조 김종림이 윌로우스에 280에이커를, 맹정희 합동농원이 140에이커, 임지성 합동농원 80에이커, 콜루사의 음대영, 임선봉이 110에이커, 우드랜드의 리순기, 백인 2인이 함께 640에이커를 경작했다.

◈ 1916. 9. 28: 한인들이 쌀 경작을 위해 우드랜드와 콜루사, 라이브 오크 등에 총 1400에이커의 땅을 빌림

◈ 1916. 10. 26: 가주 벼농사 성적에 따르면 동포들의 큰 성공을 거두었다. 벼농사 면적은 새크라멘토 밸리 평원이 6만3천 에이커, 샌호킨 평원이 3천5백 에이커.

◈ 1916. 11. 1: “일인이 동양인으로 벼농사 면적을 많이 갖자 연합회에서 동양사람 벼농사를 금지하기로 작정했다. 한인을 일인 같이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고 토지가 없으니 의견서가 통과되면 의견서를 가지고 연합회에 참여하자.”

◈ 1916. 11. 16: 각 농원의 노동자 부족으로 태평양 벼농사연합회는 노동자 부족으로 동양인을 배척하여 일을 주지 않으려던 것을 잠시 정지하였다.

◈ 1916. 11. 23: 윌로우스 벼농사의 수확/맹정희, 신광희, 마춘봉, 김순학의 130에이커 합동농장 수익이 1천여 원에 이르고, 임지성과 이진섭의 80에이커 수확 순이익 4백여 원에 이르다. 그러나 메리스빌에 거주하는 음대영는 벼농사에 실패해 5백60원을 손해보다.

◈ 1916. 12. 7: 맨티카의 12곳의 사탕무 농작 수확의 개황-국민회의 지방회 실업부원 염만석의 보고에 의하면 신경황등 8인이 300에이커에 순이익이 2백 원, 문양목 등 7인이 300에이커의 순익은 1백50원, 염만석등 3인의 1백30에이커에 순이익은 2백 원으로 각각 분배했다. 사탕시세가 점점 올라가 3대 회사가 맨티카에 들어와 경쟁하니 한 번에 큰 수가 생기지 않은 것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몇 해를 더 계속하기 바라노라.

사탕무 가격-사탕무 경작자가 1913년부터 1914년까지 운동을 계속한 결과로 1톤에 5원 40전이나 전쟁으로 8원25전 내지 10원까지 올랐다.

◈ 1917. 3. 1: ‘새해의 첫소리’-동포생활 전도.

재미동포의 생활은 앞에는 노동, 뒤에는 농업의 두 길이 열렸다. 무릇 농업은 우리 동포의 가장 손익은 실업인바 작년 성적으로 말미암아 맨티카, 스탁톤의 사탕 경영이 거의 2천 에이커에 달하였으며 테일로스빌의 6백 에이커와 빅스, 윌로우스 각 처를 통계하면 2천 에이커에 이르고 새크라멘토 콩 농사 노칸의 참외농사 오레곤 채소농사, 유타 아이다호의 무와 사탕 농사도 또한 그러하니 이상 각 농장의 시세만 가산하여도 십여 만 원이오 경작 비는 수십만 원이라 십년 동안 사업이 없는 우리 동포가 3십 만원 자본으로 농업을 시설함이 그 어찌 놀랄만한 일이 아닌가. 남 북가주 각 농원의 매일 아홉 시간 일급이 보통 2원50전이니 우리 동포의 금년 생활전도는 무궁한 낙관을 가졌고 재미 한인의 생활이 항상 이같이 곤란한 가운데 있지 않을 지로다.

◈ 1917. 3. 8: 스탁톤과 맨티카의 한인들이 3천920 에이커 대규모로 사탕무우 재배.

◈ 1917. 4. 19: 새크라멘토 합스 농사 합동하여 265 에이커

◈ 1917. 4. 26: 가주 한인의 벼농사가 점차로 확장되는데 김종림씨는 작년에 많은 이익을 얻어 금년에는 북가주 테일로스빌과 윌로우스 양 지방에 경지면적이 2천 85에이커에 달하여 ‘백미대왕(Rice King)’의 칭호를 받았다.

Taylorsville-김종림 1030 에이커, 박영순 240, 이진섭 150, 황명선 80, 임지성 80, 백신구 65, 윌로우스-맹정희 250, 신광희 100, 김두호 80 (이상 단위 에이커)

◈ 1917. 9. 13: 한인들 사이에 농장에서 알력이 있는데 대한 훈계의 글을 실었다.

◈ 1917, 10. 24: 쌔크라멘토 김홍균씨 빈스 농장은 수확총계가 2만5천 원 이상으로 예상.

◈ 1917. 11. 8: Taylorsville 김종림은 3-4만원 순수익 예상, 윌로우스의 맹정희 1만원, 신광희 5,6천 원 예상.

◈ 1917. 12. 6: 명년인 1918년 가주의 벼농사는 풍작이 예상된다는 새크라멘토 김홍균씨 통신.

◈ 1917. 12. 27: 농사에 대하여 한마디-과연 농업을 할 만한 시기/농사하는 자들은 첫째 세계 시장 형편을 잘 살피고, 둘째 세금을 내야하고, 셋째 그 농산물이 식료품에 대하여 어떠한 가치가 있는지 알아야 할지라.

◈ 1918. 1. 10: 실업성적보고서에 의하면 김종림이 제일 크게 농사를 지었는데 2사람이 합자하여 1030 에이커에 벼농사를 짓고 4만 1200 석을 추수하였다.

◈ 1918. 2. 21: 금년 우리 동포 벼농사 경작자의 참 좋은 전도/ 백 근 한 포대에 한 근에 4전으로 공정가격 표준/벼농사 한 에이커에 평균 40석을 잡아 한 근에 사전이면 한 에이커 수입이 1백 60원 이라. 그 속에 경작비 80원을 제하면 매 한 에이커에 80원의 순이익을 얻었다. 벼농사가 유망하여 수년 전 까지 겨우 5원하던 토지세가 지금은 20원 내지 25원이다. 땅 얻기가 어려우니 대자본의 합자가 필요하다.

◈ 1918. 4. 11: 금년 일인의 벼농사 면적 1만8천 에이커

◈ 1918. 4. 11: 캔탈롭 따러 오시오-30명 요구. 참외를 실어 주기까지 하고 매 박스에 17전

◈ 1918. 5. 2: 전쟁에 발흥한 캘리포니아 사업으로는 제1에 벼농사요 제2에 수수요 제3에 조선업이요 제4에 기름기 있는 콩들과 그 다음에 일반의 광산이라.

◈ 1918. 6.20: 콩밭 매러 오지 마시오. 매시간 40전을 받는다고 광고하였는데 빌립비노(필리핀사람)가 한 시간에 35전을 받기로 약조하여 일이 틀어졌으니 그리 아시고 오지 마시오. 스탁톤 김성대

◈ 1918. 6. 20: 가주의 농업-금년 성적 어떠할꼬/작년에 농업이 성공한 이유는 전쟁 중에 농산물 수요가 늘고 동남 각주가 흉년이 들어서다. 금년 가주의 농업이 팽창하여 경작지 면적이 갑절이 늘었고 자본이 넉넉지 못한 우리 동포들도 실력 이상의 자본을 꾸어대어 벼농사, 콩 농사 기타 사탕무우 일년 감 농사를 경영한 고로 한인의 돈은 농원에 들어가 잠겨있다. 가주는 지금 노동 부족으로 학교의 개학을 연기하고 맥시코에서 부족한 노동자 1만 2천명을 조건적 수입하려하고 공금을 3원 50전에서 4원 25전으로 올릴 터이고 수확기에 들어가면 5원을 주어도 일군을 얻어 쓰기가 어려울 것이다. 전시의 농업은 투기적 사업이라 이른바 투기적 사업은 장래시세를 바라고 큰 자본을 던짐이니 이는 노름과 같은 일이라 요행 바로 들어맞으면 1조에 백만 금 부자가 될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빈손만 떨어 쥐고 나서나니 대개 농업은 담력이 없이는 못할 일이라 그러나 근년이래 우리가 많은 경력이 있고 작년 풍작으로 자본이 넉넉하여 굉장한 기구를 가졌으니 기후의 변경이 없으면 대전란 종결의 영향이 있을 지라도 결단코 타격을 받지 않을지라.

1912년 북가주 써니베일에서 농사짓던 한인들

◈ 1918. 7. 4: 28일부터 시작하는 콩밭 매러 오시오. 열 시간에 3원 75전. 스탁톤 김경보

◈ 1918. 7. 11: 금년 말은 포도(건포도)의 수확은 약 80만 톤으로 작년에 비해 약 1만 톤이 증가될 터이라

◈ 1918. 8. 1: 콜루사 벼농사 현황-미국인 소유 총 면적 1만 에이커에 3분의 1은 물이 부족하여 수확의 희망이 없고 동양사람이 윌로우스와 테일로스빌에 버린 땅을 3배로 확장한 것은 잘 되어 한 에이커에 50포대를 예상한다.

◈ 1918. 8.22: 가주 벼농사 예상-가격 1천3백 만원 가주 웨스턴 벼농사 연합회의 조사에 의하면 금년 가주의 출산미는 약3백만 포대를 수확할 것으로 정부의 공정가격으로 계산하더라도 1천 3백만 원에 달할 터이다.

한국 동포들의 쌀농사 면적 총계는 4천만 평인데 순수익만 70-80만 달러이다. 1913년 캘리포니아 토지법 수정안이 오는 봄 주 의회에 제출될 터인데 일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3년 리즈를 10년으로 연장 할 것을 운동한다.

◈1918.10.10: 풀로린 지방의 포도업자들은 이번 비로 참혹한 손해를 보았는데 가주대 농과교수와 새크라멘토 상업회의소가 연구하여 시럽과 사탕을 제조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살아 날 길을 열었다.

◈ 1919. 1.17: 쌀 경작 물 값이 에이커 당 $7에서 $8로 큰 폭으로 올랐다.

◈ 1919. 2.: 에이커 당 $18의 Canal System(농작지에 수로를 연결하는 방식)이 완성되었다. ‘벼농사의 왕’크로스가 2만 2천 에이커에다 관개시설을 하였다. (1917년 11월 5일 시작)

◈ 1919. 3.22: 45인의 콜루사 한인들이 독립을 위해 싸우다.

◈ 1919. 6.21: 윌로우스 시 Glenn Company가 쌀 생산의 리더로 4만5천 에이커 소유

◈ 1919. 7. 17: 쌀값이 $4.75에서 $5로 오름

◈ 1919. 8.28: 매리스빌 통신에 의하면 휠랜드에서 합스 따는 여자들의 한시간에 35전 공금이 만족치 못하다고 하고 40전씩 달라고 동맹 파공함으로 회사주인이 허락하였다.

◈ 1919. 10. 9: 계약파기를 당한 크게 농사짓던 사람이 미국 ‘쌀의 왕’ 크로스에게 $375,000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북가주의 벼농사가 풍족하여 애국금이 4만2천955달러에 이르렀다. 최다 액이 3천 4백 달러 낸 사람이 1인이요, 3천 달러 1인, 1천 달러가 7인 그 밖의 매 평균은 3백50달러였다.

◈ 1920: 농업확장과 실패-북가주 일대에 산재한 한인의 금년 벼 농사통계는 7,990에이커인데 소출의 평균예산이 140만 달러로 예산하고 십분병작(소작하여주고 농장주에게 10% 이익 분배를 받는 소작농)이 9,760에이커에 소출이 17만 달러로 예산하였다. 그러나 11월 초승에 추수를 시작하면서 비가 연속 내려 만여 에이커의 벼를 타작하지 못하니 그 손해가 수백만 달러에 달하였다.

이로 인해 일반사업이 대 타격을 받았다. 과거 5-6년 동안 한인들이 갖은 고생 끝에 황무지를 개척하여 옥토로 만들었던 벼농사를 그 이후로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였다.

써니베일은 한인농업의 근거지로 당시 토마토는 써니베일 광야에 한없이 널려 풍작을 자랑하였다. 이민자와 유학생들이 직장을 찾으러 많이 몰렸다.


코멘트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