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의 한인들은 대부분 빈손으로 왔다. 초기 이민선이 오기 전 들어 온 인삼장사들이 있었으나 극소수였다. 이민 온 사람들은 거의 배우지도 못하고 영어도 못했다. 이들은 자연히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농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노동을 생계로 삼고 농장, 철도 공사장, 광산 그리고 어장 등에서 일했다.
각종 채소농사와 사탕무 농사를 지었다. 과수원이나 벼농사의 경작을 처음에는 주인에게 소득의 일정량을 분배받는 소작농을 하다가 후에는 자작농을 하게 되었다. 포도 복숭아 참외 등 과일 따는 일을 많이 했는데, 도시에서는 음식점 상 시중을 들거나 가정집에서는 집안일을 맡아보았다. 1916년부터 동포의 농사가 확장돼 북가주 맨티카에 27명의 동포가 1400에이커의 사탕무 농사를 지었다.
북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와 콜루사, 우드랜드, 맨티카에서 동포들이 벼농사를 시작해, 1918년에 윌로우스 동포들의 벼농사 농토 면적은 4천 3백 에이커에 달했다. 수확은 2십 2만석이나 되었는데, 그 때 쌀 한 포대의 공정가격은 4달러 25전으로 수입은 93만 5천 달러에 달했다. 1919년에도 수확이 30만석에 달하여 벼농사에 큰 기대를 걸게 되었다. 농사는 여전히 풍작이 예상되었으나 전쟁 후 쌀값이 폭락하고 갑작스런 홍수로 인해 수확을 못하자 한인들의 경제는 치명적으로 손해를 보았다. 다른 대책이 없었던 한인들은 벼농사를 계속하지 못하자 대부분 망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상업으로는 소규모 음식점이나 채소가게, 담배 가게, 이발소, 세탁소, 노동주선소등을 운영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지역에서는 세탁소를 많이 경영했다. 1929년경에는 경제공황이 몹시 심했다. 농사로는 스탁톤의 감자 농사와 맨티카의 사탕무 농사, 새크라멘토의 벼농사 소작, 쌘터벨리의 일년 감 농사, 중가주의 포도, 참외, 수박 농사들이 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래 경제가 나아지자 동포 중에 큰 사업가들이 나오게 됐다. 전쟁 후 일반의 생활수준이 높아져 한인들의 수준도 나아졌다.
그들은 돈을 벌어 많은 액수를 독립자금으로 냈다. 지금의 액수로 환산을 하면 어머 어마한 액수를 나라를 위해 바쳤다. 대한인국민회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 미주 동포들이 소유한 주택의 가격을 합치면 가격만도 3백만 달러를 초과하였고 수백만 달러의 사업체를 가진 큰 사업가도 있다고 했다.
해방 후에는 벌어놓은 돈을 가지고 귀국하여 한국에서 영업을 해 조국에서 남은여생을 보내려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해방 후 군정시절에는 입국의 자유가 없어져 애를 태웠고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민의 귀향이 더욱 곤란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귀국을 단념했다.
공립신보와 신한민보를 통해 본 노동과 경제
당시 신한민보는 한인들에게 각 지역 한인들의 소식과 정보를 제공할 뿐 아니라 논설, 사설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노동을 권장하고 실업을 일으키자는 글을 많이 실었다. 농장의 한인들의 상태를 전해주며 격려하던 신한민보를 통해 당시 한인들의 경제 상태와 노동관련 기사들을 찾아보았다.
◈ 1908. 7. 22: 미국에 있는 동포는 공수(빈손)로 환국이 불가하니 재정이나 학문 둘 중의 하나를 달성치 않으면 귀국하지 말라.
◈ 1908. 9. 16: 미주 한인의 간략한 역사 외에 앞으로의 일할 방향을 계몽한 논설/미주의 한인들이 환국 하는 것을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사실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적은 것을 경히 보지 말라. 사업을 영구히 하라. 한발은 미국에, 한발은 한국에 놓지 말라.
◈ 1908. 9. 23: 논설 ‘노동사회에 권함’/왜 우리 노동자들은 천대받는가? 남의 나라는 단체가 있고 우리는 단체 행동할 단체가 없다. 비록 육체노동을 하더라도 틈틈이 공부하길 바란다.
◈ 1908. 10. 21: 논설 ‘실업이 금일의 급무’/조선이 망한 것은 실업을 숭상하지 아니하여서다. 미주 동포는 실업에 주의하지 않고 다만 1일 1원 75전, 시간당 25전 하는 것에만 주의하니 산업이 생기지 않는다. 실업을 일으키라. 모두 참여하라.
◈ 1909. 2. 17: 일이 없는 상항의 한인들이 오클랜드로 와서 청인의 소굴에서 잡기에 빠진다. 이를 통분히 여긴다.
◈ 1909 3. 24: ‘신용을 지킬 일’/오클랜드에 모여있는 한인들은 무뢰방탕하여 청인에게 알라스카 어장에 가기로 약조를 하고 선금을 가지고 도망하여 청인과 일본인이 가끔 본사로 와서 탐문한다. 약조대로 하는 것이 사람의 행실이고 선금을 쓰고 도망하는 자는 도적이니 빨리 뉘우쳐 동포의 면목을 더럽히지 말고 신용을 완전히 지킴이 가하다.
◈ 1909. 4. 7: 논설 ‘비독립무국가귀’/독립이 아니면 가히 돌아갈 나라가 없나니라. 미주에 있는 동포가 귀국하려고 생각하는 자는 나라와 집이 있고 없는 것을 구별치 못하는 것으로 단언하노니 나도 귀국 할 날은 바라고 귀국할 날이 있으리라. 타인보다 믿지마는 다만 오늘은 아직 시기가 아니니 청컨대 미주에 있는 우리 동포는 장검을 들고 감개한 소리로 귀국가를 한번 불러보세. ‘도라가세 도라가세 재미동포 도라가세(중략) …… 유사무생 하올때에 귀국하세 귀국하세.’
◈ 1909. 5. 5: 재미동포가 해삼위에 태동실업회사 발기 (자본금 25,000원/1000주 25원/1주)/자, 재미동포는 특별한 자질을 가진 자로 상공실업의 막대한 세력을 보이라.
◈ 1913. 10. 24: 가주 한인 노동 전도/지금 가주에 있는 7,8백 명 한인 동포의 생활은 노동에 있으나 1915년 샌프란시스코 만국박람회로 각국 노동자가 증가하여 금년 7월경에 가주에 들어온 외국인 수가 17만 명이다. 이제 곧 파나마 운하가 준공되면 그 역부들도 필연 가주로 돌아오게 되어 노동자가 많아져 한인들이 곤란하게 될 것이다. 가주에서 동양인 배척문제가 심각하여 우리 한인들은 신과 진실로 일을 하되 노동은 임시생활로 여기고 한푼이라도 저축하여 완전한 농업이나 상업을 경영하여 실업을 잡으라.
◈ 1914. 1. 1: 실업가 자본가에게/‘서로 협동하여 실업을 일으키자.’
◈ 1914. 6. 11: ‘미주 동포의 경제상 전도’논설/생존경쟁시대에 기운을 피고자 하면 경제를 일으키자. 백만장자 청인이나 일인의 부자들도 다 집에서 돈을 가져와서 된 것이 아니니 우리동포들도 사업을 시작하자. 가주 남방에 귤 따는 동포가 1백 명은 되니 50원씩이라도 5천 원이요, 새크라멘토에 합스(밀보리) 따는 때도 1백 명은 모이니 40원씩이라도 4천 원이요, 다뉴바 포도철에 1백 50명이 50원씩이라도 7천 5백원이니, 그곳에서 버는 돈만 합해도 매년 1만 6천 5백원이니 그 외 각처에서 합하면 2만원으로 회사는 매년 하나씩 설립할 수 있으니 동포들은 합심하여 금년 합스와 포도 딸 때 시험하고 실행하기 바란다.
◈ 1915. 10. 28: ‘실업을 주의하라(주목하라)’/실업은 실력의 어미, 실력은 인류의 혈맥이다. 실업 실력을 길러 놓은 뒤에야 실지 사업을 이룰 기회가 있을지니 공사간 행복을 위하여 실력 기르기를 각각 주의함이 곧 우리 한족의 급선무라 하노라.
◈ 1916. 8. 3: ‘노동계에 고함’/노동은 재미한인 생활의 단목으로 열린 길이라 우리는 노동으로 살아가나니 노동이 아니면 사업도 없고 생활도 없다 하노라. 노동이 아니면 단체도 없고 학계도 없고 내 나라에 돌아 갈 수도 없고 이 나라에 있을 수도 없나니 노동은 우리의 낙관이오 행복이라 노동을 보호하며 노동을 유지하라
◈ 1916. 8. 24: ‘노동 문제 주선’/한인 노동자들이 노동을 주선하고 도망을 가거나 사기를 치니 노동 주선이 위기 상황이다. 노동주선을 협잡꾼들이 장악하고 10에이커를 맡고 2-3에이커는 으레 은닉하여 동포가 정당치 못한 일이라고 말을 하면 매를 주고 쫓아낸다. 노동자간에 단결이 안 돼 세 사람만 모이면 삐죽거리고, 싸움이 생기면 보따리를 싸고 헤어지니 노동주선자는 재정손해에다 신용의 손해를 보아 노동주선이라 하면 도망을 가니 자연히 파락호가 권리를 잡는다. 미국 사람은 신용을 생명같이 여겨 맨티카 양찬관(식당)은 노동 주선자 조동호가 도망한 후에 한인을 거절한다고 한다. 지금 가주에 노동계를 돌아보건데 단결력이 엉성하여 노동회를 세울 수도 없고 버려 두자니 재미 한인 장래에 큰 근심이니 북미 총회에서 간섭해 달라.
◈ 1916. 11. 9: ‘전쟁시대의 미국경제와 미국의 장래-전쟁 후 가주는 어찌될꼬/미국 경제가 뜻밖에 이와 같이 풀려 금년 일년을 아무 일 없이 지낸바 새크라멘토 콩 농장과 각 처 벼 농장은 장래 희망이 적지 않으며 노동방면으로 말하여도 매일 공금이 보통 2원 50전 이상이니 우리가 이때에 자본을 만들지 못하면 다시 이러한 기회가 없다 하노라.
◈ 1916. 11. 16: 하와이 한인은 일인의 쌀 간장을 먹지 말어라. (우리가 일인 간장을 먹어) 일인을 주는 돈이 1년에 20 만원에 이른다.
◈ 1916. 11. 23: ‘이상하다. 우리 한인은 왜 장사를 못하나뇨’- 자본이 없는가/지식이 없는가, 공동력이 부족함인가. 아라사 사람이 비웃어 말하길 청인이나 일인은 담배장사라도 하거늘 저것들은 남의 품이나 팔고 마니 이상한 백성이라 하더라. 샌프란시스코 그 굉장한 시장에 한인은 무 배추를 갔다 놓은 식물점 하나 없고 하우스보이로 거의 늙어 가니 마땅히 국민경제가 있을 우리가 세계적 경제까지 있을 우리가 영업적 행위에 어린아이가 되고 그 어찌 실패를 면하며 그 어찌 멸망을 면하리오. 미국사람이 일인을 그렇게 몹시 미워하지마는 일본 상업에 가는 기쁜 마음으로 사는 것은 금전의 세력이라.
◈ 1916. 12. 21: ‘한인 상업 시설에 대하여 의견을 공급’-식물상점을 목덕/새크라멘토와 스탁톤 부근에 체류하는 동포는 식물상점을 경영하며 상항 방면은 중국인 시가에 고공상점에 식물상점을 겸하여 경영한다 하니 이 두 가지 계획이 다 해롭지 않은 계획이라. 새크라멘토 일본인 상점에서 금년 일 년간 한인의 식료품을 공급한 것이 3만원이라 하니 우들랜드의 이순기씨의 6백 에이커 벼 농장의 일년 식료품 통계가 수천 원이라 기타 윌로우스, 델라빈, 콜루사, 빅스의 벼농장과 맨티카등 12곳 농장을 합치면 3만 이상이 될 것이니 일인의 매매는 끊고 북가주는 새크라멘토 남가주에는 싼타아나에서 자영 농업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각 농원에 헤쳐 주어도 이익을 볼 것이다. 각 농장 모든 식료품값이 상항보다 3배가 비싸다.
일반 동포에게 최후로 한마디 말을 더 권하노라. 백 원이나 50원이 실로 많은 돈이 아니니 영업에 마음만 있으면 사람마다 한 고본(주)을 살지오. 나중 결과는 직접으로 이익을 취하고 간접으로 동포의 경제를 늦추어 오늘날 곤란한 형편을 벗어날지라. 그 무엇이 해로워서 빨리 도모치 않나.
◈ 1917. 12. 13: 실업 보호 문제/재작년에 비로소 북미 총회에 실업부가 성립되어 총회와 각 지방에 실업부원을 두고 각처 동포의 실업의 쇼당을 조사 보고케 하였다. 실업상 주의 할 것은 1.토질을 검사하고 2. 교섭을 주의하고 3. 계약서 작성에 주의하라.
◈ 1918. 1. 24: 실업문제 1등 당선자 발표-제목은 ‘재미한인의 실업을 어떻게 발전할까?’
1등 시카고 동우(이름없이 응모) 상금 15원-4년제 실업기관을 조직하자. / 2등 헐리웃 로웰(곽림대) 상금 10원-주식회사 조직, 은행설립, 동맹 저금회 조직하자 ./ 3등 네브라스카(정한경) 상금 5원-4년제 대학을 나와서 실업하자. 농업, 화학, 지리학 순서로 하는 것이 좋다. 2-3년 제 대학을 나와 일하는 방법으로는 부기 회계 자동차 기계학이 있다.
◈ 1918. 5. 30: 한인의 황금시대-이 기회를 잃지 맙시다/미주에 건너온 우리 한인이 십 년 동안 노동으로 수천 원 이익을 얻었다 하여 귀국하는데 십여 년간 자유의 공기를 호흡하던 우리 동포가 그 자유정신은 어디다 두고 홀연히 원수의 굴혈로 들어가는가. 오늘날 황금시대에 처한 우리 미주동포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실업장군의 능력을 다하여 자본을 넉넉히 모은 후에, 장차 평안도로 돌아가던지 경기도로 돌아가던지 하지 말고 어서 바삐 만주를 경제력으로 정복하여 장차 우리 족속의 국가기초를 열어 놓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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