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들이 만든 주요 사업체

Read in English

아세아 실업주식회사

1908년 김사옥, 김종림, 정원도, 김영일, 황사용, 이재수, 오진국 등 31인이 합동하여 “식산흥업에 근본하여 농상공을 불문하고 내지 혹 외국에 적당한 곳이 있으면 곧 실시하여 우리 국민의 실업계에 표준을 짓자”라는 기치로 설립한 회사다. “내외의 동포는 수백 원을 아끼지 말고 모여 10년, 15년 후에 수억만 원 재정을 정리하면 우리의 잃었던 산림광산 철도권을 다 찾을 것이요 국가의 자주독립을 완전히 회복할 것”이라고 하며 주주를 모집했다. 자본금 2만원으로 8백 구좌에 각 주권 25원으로 목적은 부의 축적과 조국의 광복에 두었다. 이렇게 설립된 아세아실업주식회사는 그 사업을 대한인국민회가 주관하게 되고 원동 독립군 근거지를 만들기 위한 군사운동의 부대사업으로 이어져 태동실업주식회사’라고 이름을 바꾸게 된다. 상항공립신보사내에 사무실에는 정원도와 김영일이 책임을 지고 프레즈노 연합공립관에는 김사옥과 김종림 담당하였다.

권업주식회사

1908년 3월18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방화중씨 등이 “내지(한국)동포가 외국인에게 토지 팔아먹는 악폐를 금하고저” 권업주식회사를 발기하고 자본을 모집했다.

태동실업주식회사

1909년 4월 53개조의 규칙을 정하고 5월5일부터 주식금액 모집광고를 내고 자본금 총액을 5만 달러로 정하고 매주 50달러씩 1천주 모집을 시작했다. 사무실을 샌프란시스코 국민회관 안에 두고 임시 재무를 김영일로 하였다. 회사설립의 목적을 “.아라사, 영지, 오소리 등지에서 농상 등 실업을 경기 진흥하여 이익을 도모함”에 두었다. 북미 대한인국민회는 이 회사를 통해 원동에 독립군 근거지를 만들려고 하였다. 만주와 연해주 지방에 국민회 특파원으로 파견된 정재관으로 하여금 ‘봉밀산현’에 미간지 2천430에이커를 사서 개간하게 하고 만주와 아령에 있던 가정 200호를 이민시키려 했다. 그러나 마적의 행패로 이루지 못해 사업은 실패하고 경비만 3천 달러 소모하고 말았다.

한미 무역회사

1910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최영만이 한국산 상품으로 무역할 목적으로 회사를 조직하였다. 자본금 총액은 2만 달러로 하고 매주 10달러씩 2천주를 목표로 했는데 250주를 모집했다. 최영만은 1910년 7월12일 만추리아 선편으로 한국화물 수입을 위해 귀국하였다. 그러나 한일 합방 후 최영만은 도미허가를 얻지 못하여 회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흥업주식회사

1910년 2월9일 남가주 레드랜드에 사는 동포들이 안석중의 주선으로 회사를 조직했다. 자본금 총액은 3천 달러로 매주 50달러씩 60주를 모집하여 농업에 투자했다.

허・리 상회

1911년 10월에 허승원과 리순기가 합자하여 북가주 스탁톤에 잡화상점을 열고 각 농장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였다. 이것이 캘리포니아에서 시작한 한인 상점으로는 처음 상점이었다.

한인 농업주식회사

1915년 1월1일자로 자본금 1만 달러에 1주당 10달러씩 주식을 팔았다. 사장 안재창, 회계 최경오, 서기 신형오.

연합식산회사

1920년 11월12일 윤병구, 김종림, 홍종만, 정몽룡이 발기하여 북가주 윌로우스지방에서 연합식산회사를 조직하였다. 사장 윤병구, 부사장 겸 재무 김종림, 이사 홍종만.

북미 실업주식회사

1917년 1월20일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직하여 1927년까지 10년 동안 주로 북가주의 벼농사에 주력한 흥사단 단우들의 회사였다. 도산은 한인의 자본으로 회사와 금융기관을 설립하여 민족기업을 일으켜 국제무역에 신용거래를 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하려고 했다. 당초 미곡 경작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미국에서 벼농사가 호황이던 시기에 착수한 사업이었다.

처음 두 해 동안은 상당한 이익을 남겼으나 1920년 북가주의 벼농사가 실패한 뒤 흉작에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쌀 가격이 떨어지는 바람에 크게 실패했다. 경제적 실력양성론에 입각하여 흥사단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역점을 두어 추진했던 수익사업이었다.

발기자는 도산 안창호, 사장에는 경제에 밝은 임준기를 선임하고 총무에 송종익, 재무에 정봉규를 위촉하였다. 맹종호, 김인수, 김사원. 조성화 등이 가입하였고 자본금 총액은 9만5천 달러인데 매주 1백 달러씩 950주를 두 번에 나누어 모집했다.

제1차에 4만5천 달러와 제2차에 5만 달러를 모집하였다. 당시 10만 달러에 달하던 자금은 원동(중국)으로 이전하면 20만원의 가치가 되므로 도산은 그곳에 금융기관을 설립하고 한 중 두 나라의 민간자본을 증대하여 큰 사업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1920년 벼농사 실패 후 윌로우스 농장에서 3만 달러의 손해를 보고 이순기의 송사에 걸려 자금이 동결되었다. 월부로 매수하였던 귤 밭을 잃어버리고 당우에게 대여 받았던 자금도 상환이 불가능 하자 사업이 쇠퇴하여 결국 1927년 문을 닫았다. 1929년 김종림, 김순권, 곽림대가 회사정리를 맡았는데 매주에 15전 1리 6모 씩 돌려주었다. 흥사단 사업으로 1932년 또 한 번 흥업회사를 계획하였는데 실행을 보지 못했다. 1938년에는 흥사단 단원들이 ‘대동실업주식회사’를 세워 찹수이 등 도매업을 시도하였으나 역시 몇 년 후 문을 닫고 말았다. 한편 이외에도 여러 주식회사가 생겼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1918년 5월19일 신한민보에는 다음과 같은 발기자 모집광고가 실렸다.

“은행채 보상 발기자는 매 명 6원을 내는 자로 오백 명을 모집하기로 작정한바 처음 22인을 제 1회로 잡고 그 다음 22인을 모아 제 2회를 만들고 그 후에는 차례로 이와 같이하여 발기자 모집권한을 양여 할 터이오니 뜻이 같은 여러 동포께서는 속히 응모하여 발기자 모집에 힘쓰기를 바라나이다.

수전소는 북미 총회 사무소: 419 Hewes Bldg. 샌프란시스코”

그 외에도 하와이 한인농산주식회사 (1911년3월), 네브라스카 한인농업주식회사(1914년4월),미시건주 디트로이트 유한주식회사(1925년3월)가 설립됐던 기록이 있다.


Comments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