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최초로 법학박사를 받은 강영승(1888-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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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17세였던 1905년 하와이로 이민 왔다. 자녀들에 대한 교육열이 유난히 높았던 어머니 황 마리아와 누나 강혜원, 동생, 그리고 미국에 오기 직전 결혼한 부인 강원신이 함께 왔다. 강영승은 신체검사 중 눈 검사에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이민국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3주 가까이 온 가족은 이민국이 있던 샌프란시스코 ‘엔젤 아일랜드(천사도)’라는 섬에서 기다려야했다.

더구나 이민국에서는 17살짜리 남자 혼자 나머지 가족을 부양하기 힘들다고 보아 돌려보낼까 하는 심사를 했다. 어머니는 실크 등 가진 것 중 값나가는 것을 주고 사정을 하여 통과되었다. 하와이에서 17살의 나이에 초등학교 3학년으로 들어가 공부하였다.

그는 어머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수재였다. 시카고 해밀톤 법과대학에서 ‘증거를 세우는 규칙’이라는 논문으로 한인으로는 처음으로 법학박사가 된다. 그때 미주 한인들은 이승만 박사, 정한경 박사 그리고 강영승 박사를 셋을 ‘미주의 3박’이라고 불렀다.

공부를 끝내고 변호사개업을 하려고 시험을 보려하자 동양인은 변호사 시험조차 볼 수가 없었다. 황인종이고 시민권이 없다는 이유였다. 시민권을 신청하여도 동양인에게는 내어주지 않았다. 10년의 공부가 수포로 돌아가자 그것은 강영승만의 고통이 아니라 10년을 기다려온 온 가족의 슬픔이었다. 다시 농장 일과 포도 따는 일을 하다 장래가 없는 듯하여 1920년 큰 도시 샌프란시스코로 왔다.

인종차별로 인한 고통과 모욕의 세월 속에 지내다가 이대위 목사의 권유로 지방에 다니며 선교활동을 폈다. 부인 강원신여사는 대한여자애국단 제3대 총부 단장을 지냈고 누님 김혜원은 초대애국단단장을 지냈다

1921년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미주한인을 위한 봉사와 독립운동에 전념하고 신한민보의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아 미주교단의 대동단결에 힘썼다. 원래 의사가 되려던 꿈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후에 동양의학을 배워 부인의 권유로 한의원이 되어 인술봉사를 50여 년 했다. 1972년 ‘Oriental Medicine in Modern Practice’라는 의학서적을 펴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살면서 기독연합한방원의 특별의술지도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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