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맺은 일본은 1910년에는 강제로 한일 합방을 체결했다. 조국에 더욱 암울한 그림자가 짙어지자, 이미 수천 명의 한인들이 이주해온 미주에서는 자연스럽게 구국운동이 불붙게 된다. 애국지도자들의 계몽 선도적 역할이 컸지만, 고국을 떠나와 고생스런 삶을 살고 있는 이민들에게 ‘기운 조국을 우리 힘으로 바로 세우자’는 대의적 제안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가장 중대한 목표의 하나가 됐다. 자녀들에게 한국의 문화유산을 이어 받게 하고 극심한 노동에도 건강히 살아남기만 하면 일본이 물러간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한인들은 더욱 일심으로 단결하여 정치적인 항일운동과 독립군 양성을 통하여 구국투쟁을 전개했다. 본격적인 독립운동은 1905년부터로, 이때부터 해방이 되기까지 무려 40년간 미주 한인들은 끈질기고 꾸준하게 애국, 애족에 힘을 모았다.
무력항쟁을 위한 독립군 양성이 한때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워낙 조국과의 먼 거리에 있는 관계로 실효를 보거나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보내는 독립자금 모금에는 한인들이 거의 다 참여했고, 또 그 액수가 상당했다. 뿐만 아니라 애국단체를 조직해 그 상황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고, 일본상품 안 쓰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20년 노백린 장군과 레드우드 비행학교 출신 한인들이 ‘쌀의 왕’ 김종림의 도움으로 조국독립을 목적으로 윌로우스에 비행학교를 세 웠다.
북가주 새크라멘토 근처 윌로우스시에 세운 비행학교는 일본과의 독립전쟁에서 필요한 비행사를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미주한인들의 힘으로 세운 비행학교였다. 당시 일본의 공군병력은 전무하여 일본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공군병력으로만 가능하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땅을 얻고 비행기를 사서 태극마크를 달고 비행사를 양성했다. 그러나 잘 진행되던 비행학교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1918년 1차 대전이 끝나고 쌀 수요가 감소되고 전쟁 중 벼농사를 짓지 못하던 나라들이 다시 경작을 시작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1920년 11월과 12월에 북가주 지방에 엄청난 홍수가 나 한인들은 미처 거둬들이지 못한 벼를 전혀 수확하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이에 한인들의 쌀농사는 다시 복구하지 못하게 됐는데, 재정의 대부분을 지원하던 쌀 농장부호 김종림의 농사도 홍수로 인해 망하고 설상가상으로 박희성이 백인에게 무상으로 비행기를 빌려 비행면허 시험을 보다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재정적 손실이 컸다. 1921년 4월 비행학교도 눈물을 머금고 완전히 문을 닫아야만 했다.
윌로우스 시로 들어가는 도로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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