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케이블카를 타고 거리 이름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서


며칠 전부터 마음속에 그려왔던 샌프란시스코 케이블카 & 스트리트카 대탐험의 날. 오늘도 여정의 시작은 엠바카데로(Embarcadero) 역이다. 마켓 스트리트(Market St.)의 동쪽 끝자락, 코앞에 페리 빌딩이 버티고 섰으니, 오늘은 바다에서 도시의 심장부로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겠다. 케이블카 세 개 노선을 차례로 정복하며 샌프란시스코의 큰 그림을 머릿속에 담고, 그 위에 나만의 상상을 덧칠해볼 참이다.

문득, 이 마켓 스트리트라는 길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필라델피아를 비롯한 미국 여러 도시에서 ‘마켓 스트리트’라는 이름을 심심찮게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마치 우리나라 지방 도시에 ‘중앙시장’이나 ‘중앙로’가 빠지지 않듯 말이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 자연스레 시장이 서고, 그 길이 도시의 중심축이 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한 이치일까? 뉴욕의 브로드웨이(Broadway)처럼, 길게 뻗은 길이 도시의 동맥 역할을 하는 것도 어쩌면 세상 모든 도시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풍경인지도 모르겠다. ‘넓은 길’이라는 의미의 브로드웨이나 브로드 로드(Broad Road) 역시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이름이니 말이다. 아무튼, 오늘은 이 중요한 마켓 스트리트의 북쪽 지역을 탐험하고, 기회가 된다면 남쪽의 소마(SoMa) 지역까지 발길을 넓혀볼 생각이다.





언덕 너머의 풍경, 캘리포니아 라인의 아찔한 매력

첫 여정은 엠바카데로 역 바로 앞에서 시작하는 캘리포니아 라인(California Line) 케이블카. 샌프란시스코 케이블카 중 유일하게 동서를 가로지르는 노선이다. 덜컹이며 언덕을 오르는 케이블카 뒤편으로 남겨진 길을 돌아보니, 과연 샌프란시스코의 언덕이 얼마나 가파른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저 멀리 베이 브리지까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오르막길을 지나니, 반대편 남쪽으로 펼쳐진 내리막길의 경사도 만만치 않다.

느릿느릿 종점인 밴 네스 애비뉴(Van Ness Ave)까지 가는 동안, 솔직히 말해 언덕이라는 압도적인 존재감에 다른 풍경은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딕 양식의 웅장한 그레이스 대성당(Grace Cathedral) 정도가 시선을 사로잡았고, 몇몇 공공건물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자세히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종점에 도착했지만, 굳이 주변을 오래 둘러볼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언젠가 식사를 하러 와봤을 법한 레스토랑들이 즐비했지만, 그게 프랑스 요리였는지 이탈리아 요리였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파월 라인의 재담꾼 운전사와 거대한 차이나타운의 비밀

다시 밴 네스 애비뉴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파월 스트리트(Powell St)에서 내렸다. PM(파월-메이슨) 라인과 PH(파월-하이드) 라인으로 갈아타기 위해서다. 평일임에도 케이블카는 만원이었고, 운 좋게 발판에 매달려 가는 짜릿한 기회를 얻어 PH 라인에 몸을 실었다. 아까 캘리포니아 라인의 과묵했던 운전사와는 달리, 젊은 PH 라인 운전사는 웬만한 여행 가이드 뺨치는 입담으로 승객들을 즐겁게 했다. 토니 베넷의 노래 가사를 인용하며 “Don’t leave your heart in San Francisco (샌프란시스코에 마음을 두고 가지 마세요, 하지만 팁은 두고 가세요!)” 같은 유쾌한 농담은 물론, 주변 맛집 정보까지 쉴 새 없이 쏟아내는 그의 안내 덕분에 가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라는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지는 순간이었다.

놀라웠던 점은, 아까 캘리포니아 라인을 타고 지나며 얼핏 보았던 차이나타운이 PH 라인을 타고 한참을 더 가서야 “차이나타운 가실 분 내리세요!”라는 안내가 나올 만큼 거대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 타운은 미국에서도 가장 큰 중국거리라고 한다.

내 느낌에는 마치 샌프란시스코의 또 다른 중심가, 브로드웨이(Broadway) 근처까지 이어지는 듯했다. 처음에는 마켓 스트리트 부근에서 시작된 차이나타운이 브로드웨이까지 연결된 줄 알았지만, 나중에 확인해보니 부시 스트리트(Bush St)에서 시작해 브로드웨이까지 이어지는, 약 1km가 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거리 이름 속에 숨겨진 샌프란시스코 이야기

문득 샌프란시스코의 거리 이름들에 다시 한번 관심이 갔다. 이곳의 거리 이름들은 다른 주의 이름, 도시 이름, 역사적 인물의 이름, 심지어 문화적 사실이나 역사적 배경을 담은 이름까지 그 유래가 무척 다양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존 프리몬트의 이름을 딴 프리몬트 스트리트(Fremont Street), 두 개의 봉우리를 뜻하는 트윈 픽스(Twin Peaks), 스페인 선교 역사를 담은 미션 스트리트(Mission Street)처럼 말이다. 심지어 행성 이름을 딴 유머러스한 유레너스 테라스(Uranus Terrace) 같은 이름도 있다니! 1906년 대지진과 화재 이후 거리 이름을 대대적으로 정리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하니, 거리 이름 하나하나가 샌프란시스코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작은 이야기책인 셈이다.


PH 라인의 하이라이트와 뜻밖의 발견

PH 라인의 진정한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아찔한 언덕길 끝자락에서 저 멀리 알카트라즈 섬을 바라보며 질주하는 순간일 것이다. 물론, 오른쪽으로 슬쩍 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구불구불한 길, 롬바드 스트리트(Lombard Street)의 풍경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지난번 페리 빌딩에서 시작해 피어(Pier)들의 홀수 번호를 따라 걸어 올라왔던 피셔맨스 워프(Fisherman’s Wharf)가 PH 라인의 종점이다. 이곳에서 내려 잠시 화장실을 찾다가 우연히 발길이 닿은 곳, 샌프란시스코 해양 국립 역사 공원 방문자 센터(San Francisco Maritime National Historical Park Visitor Center). PH 라인 종점에서 바닷가로 조금만 내려가면 만날 수 있는 이 건물 안은, 샌프란시스코 여행자라면 꼭 한번 들러야 할 숨겨진 보석 같은 곳이라고 확신한다. 스페인 탐험가들이 처음 마주했던 이 지역 원주민 부족들의 이야기부터, 골든 게이트를 넘나들던 다양한 배들의 역사까지, 샌프란시스코 바다의 모든 이야기가 이곳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다시 케이블카, 그리고 낭만적인 스트리트카와의 만남


다시 PH 라인 종점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반대편 마켓 스트리트 방향으로 향했다. 아까 스쳐 지나갔던 롬바드 스트리트의 시작점을 다시 한번 눈에 담고, 러시아인들이 정말 많이 살았을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러시안 힐(Russian Hill), 영국 귀족들이 터를 잡았을까 상상하게 되는 노브 힐(Nob Hill) 등 샌프란시스코의 지명에 얽힌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마켓 스트리트에 늘어선 식당들을 구경하다 이케아(IKEA) 내부의 간이식당에서 스웨덴식 핫도그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마켓 & 파월 스트리트 회차 지점에서 PM 라인에 올랐다. 이번에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상상 속으로) 차이나타운을 지나 노스 비치(North Beach)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느끼며 다시 피어 39 방향으로 달렸다.

조금 걷다가 아쉬움이 남을 즈음, 마법처럼 F-라인 스트리트카가 눈앞에 나타났다. 더 걸을 생각이었지만,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다가오는 빈티지한 전차의 유혹을 뿌리치기란 불가능했다. 창문 위로 길게 늘어선 노란색 줄을 당겨 하차 신호를 보내는 방식은, 잊고 지냈던 옛 시절의 정겨움을 떠올리게 했다.


페리 빌딩 앞에 내려 오늘 여정을 시작했던 엠바카데로 역으로 돌아오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서울에 강남대로와 마포대로가 있다면, 샌프란시스코에는 엠바카데로(Embarcadero), 즉 ‘선창가 길’이라는 의미를 담은 ‘대로(大路)’가 있는 걸까? 문득 마포 또한 예전에는 배가 드나들던 선착장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역시, 세상 사는 곳은 이렇게 닮아있나 보다. 케이블카와 스트리트카에 몸을 싣고 샌프란시스코의 속살을 엿본 하루, 거리 이름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들이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이 도시의 길들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역사가 교차하는 살아있는 무대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