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우리는 San Francisco 1920을 통해 샌프란시스코의 골목마다 숨겨진 한인 이민자들의 땀과 눈물을 추적해왔습니다. 그것은 낯선 땅에 뿌리내린 사람들의 역사를 읽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과거에 미래를 더하다”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그 시야를 조금 더 넓혀보려 합니다.
오늘은 도시를 품고 있는 거대한 대지, 샌프란시스코 북쪽 해안으로 떠납니다. 빽빽한 빌딩 숲과 금문교의 붉은 주탑을 백미러 뒤로 보내고, 101번 국도(Highway 101)에 올랐습니다. 이곳은 인간의 시계가 아닌, 자연의 시계가 흐르는 곳. 이 여정은 단순한 드라이브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태고의 시간을 달리는 순례입니다.
1. 세상의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 트리니다드 (Trinidad)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로 5시간 남짓. 라디오의 주파수가 지지직거리고 도시의 소음이 완전히 사라질 무렵, 우리는 트리니다드(Trinidad)에 닿았습니다. 샌프란시스코가 복잡하고 치열한 대하소설이라면, 트리니다드는 짧고 강렬한 서정시와 같은 곳입니다.
깎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 위에 서자, 태평양의 거친 파도가 안개에 싸인 거대한 바위(Sea Stacks)들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곳은 수천 년 전 유록(Yurok) 부족이 고래를 바라보며 삶을 일구던 터전이기도 합니다. 차가운 바닷바람에 섞인 짙은 소금기, 그리고 뒤편 숲에서 불어오는 알싸한 침엽수 향기. 이곳은 문명의 속도와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마치 세상의 끝자락에 서 있는 듯한 고독과 자유를 동시에 선사합니다.

2. 오래된 술집과 목재왕의 유산, 유레카 (Eureka)
트리니다드의 야생을 뒤로하고 남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빅토리아 시대의 우아함이 박제된 도시 유레카(Eureka)를 만납니다. 안개 낀 거리에 늘어선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이곳이 한때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웅변합니다.

여행의 묘미는 현지인과의 대화에 있습니다. 올드 타운의 ‘Oyster Bar & Grill’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나는 살아있는 역사를 만났습니다. 닳고 닳아 반질거리는 목재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만난 지역 사람들. 그들은 낯선 이방인에게 굴 접시를 건네며, 거친 파도와 싸우던 어부들의 무용담과 톱밥 날리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전설적인 인물 중 하나가 윌리엄 카슨(William Carson)입니다. 19세기 말, 북부 캘리포니아의 경제를 거머쥐었던 목재왕. 그가 샌프란시스코로 보낸 거대한 목재들은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샌프란시스코의 뼈대가 되었습니다.
유레카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카슨 맨션(Carson Mansion)은 그 부의 상징입니다. 지금은 사교 클럽(Ingomar Club)으로 쓰여 내부를 볼 순 없지만, 화려한 빅토리아 양식의 외관만으로도 당시 목재 산업의 위용을 짐작케 합니다. 카슨의 야망이 서린 저택과 굴집 노인들의 소박한 주름살. 유레카는 이 두 가지 얼굴을 모두 가진 매력적인 도시입니다.

3. 신들의 정원을 지나다, 레드우드 (Redwoods)
유레카를 벗어나 남쪽으로 향하는 길은 거인들의 거리(Avenue of the Giants)로 이어집니다. 이곳의 주인은 인간이 아닙니다. 바로 레드우드(Redwoods)입니다.
‘거대하다’는 형용사로는 부족합니다. 로마 제국이 흥망성쇠를 겪을 때 이미 싹을 틔운 이 나무들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라, 숲 아래로 들어선 인간을 겸허하게 만듭니다. 자동차라는 현대 문명의 이기를 타고 수천 년 된 나무 터널을 지나는 기분은 묘합니다. 빽빽한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빛줄기(Sunbeams)를 맞으며 달리는 순간, 우리는 찰나를 사는 존재가 되어 영겁의 시간과 조우하게 됩니다. 과거의 숲을 가로지르며 미래로 달리는 이 순간이야말로, 우리 블로그가 추구하는 여행의 참모습일 것입니다.
4. 동화 속 항구와 유리 해변, 포트 브래그 (Fort Bragg)
거인들의 숲을 빠져나와 해안 도로 1번(Highway 1)을 따라 내려오면, **포트 브래그(Fort Bragg)**가 기다립니다. 이곳의 **노요 항구(Noyo Harbor)**는 마치 동화책의 한 페이지를 찢어 놓은 듯 평화롭습니다.

샌프란시스코 베이의 거대한 컨테이너선은 잊으세요. 이곳엔 알록달록한 페인트가 칠해진 작은 목선들이 옹기종기 모여 파도에 몸을 맡깁니다. 갓 잡은 생선을 나르는 어부들의 분주함 속에 깃든 평화로움. 그 풍경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면서 동시에 완벽한 휴식처입니다.
특히 이곳의 글래스 비치(Glass Beach)는 놓칠 수 없는 명소입니다. 과거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 유리병들이 수십 년간 파도에 깎이고 다듬어져, 이제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자갈이 되었습니다. 소문처럼 빛나는 유리를 발견하기 쉽지 않지만, 인간의 실수를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자연의 위대한 힘을 목격할 수 있는 곳입니다.
[Writer’s Pick] 놓치면 후회할 숨겨진 명소들
글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현지인들도 아껴두는 진짜 명소 세 곳을 추가로 소개합니다.
1. 펀 캐년 (Fern Canyon)
위치: 유레카 북쪽 프레리 크릭 레드우드 주립공원 내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 <쥬라기 공원>을 찍기 위해 선택한 곳입니다. 15미터 높이의 수직 절벽을 빽빽하게 뒤덮은 고사리(Fern) 벽 사이를 걷다 보면, 공룡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원시 지구의 풍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좁은 협곡 사이로 흐르는 냇물을 밟으며 걷는 트레킹은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합니다.
2. 포인트 카브릴로 등대 (Point Cabrillo Light Station)
위치: 포트 브래그와 멘도시노 사이
1909년부터 뱃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어준 역사적인 등대입니다. 푸른 초원 위에 그림처럼 서 있는 하얀 등대와 빨간 지붕의 관사,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진 끝없는 태평양은 캘리포니아 북부 해안의 아이콘과도 같습니다. 특히 해 질 녘, 등대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의 낭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3. 멘도시노 헤드랜즈 (Mendocino Headlands)
위치: 포트 브래그 남쪽 10분 거리
포트 브래그를 방문했다면 바로 아래 멘도시노(Mendocino)를 지나칠 수 없습니다. 절벽 위에 세워진 이 마을은 19세기 뉴잉글랜드 스타일의 건축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마을 전체가 문화유산입니다. 헤드랜즈 주립공원의 절벽 산책로를 걸으며 야생화와 바다를 감상하는 것은 이 여행의 백미입니다.
Epilogue: 다시, 길 위에서
트리니다드의 바람, 유레카의 역사, 레드우드의 침묵, 그리고 포트 브래그의 파도 소리. 북부 해안 여행은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가 생겨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캘리포니아의 원형(Archetype)을 확인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백미러 속으로 멀어지는 레드우드 숲을 보며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거대한 땅의 역사 위에 잠시 머물다 가는 여행자일 뿐이지만, 그렇기에 우리가 보고 듣고 기록하는 이 순간들이 더욱 소중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북쪽의 서늘한 안개와 숲의 향기를 가슴에 담고, 차를 돌립니다. 다음 여정은 태양과 예술이 넘실대는 남쪽입니다. 거친 파도가 아름다운 **하프문 베이(Half Moon Bay)**를 지나, 캘리포니아 역사의 시작점 몬터레이(Monterey), 그리고 예술가들의 영혼이 깃든 **카멜 바이 더 씨(Carmel-by-the-Sea)**로 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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