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1901년 배재학당을 졸업했다. 영어를 잘 하여 인천세관에서 첫 번째 한인 통역관으로 1년을 일하다 수민원 통역관 시험에 합격했다. 1903년에 첫 이민선의 통역으로 미국에 온 그는 사탕수수농장에서 통역관으로 11년간 하와이에 살았다. 초기에 통역관 5명중의 하나로 겨우 19살이던 당시 한 달에 75달러씩이나 되는 높은 임금을 받았다.
다른 사람은 시간당 10센트를 받던 시절 그는 법정 통역에다 한인들의 책임자일 등 여러 일을 하여 한 달에 4백 달러를 벌었다.
1909년 한국으로 돌아가 한덕세와 결혼을 하고 중국 상해에서 살았는데 일본정부가 통역관이 되어 달라고 하는데 거절을 하고 체포될까 두려워 새벽 한시에 상해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왔다.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에 3개월을 잡혀있었다. 1913년 그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직장을 잡을 수 없어 고등학교에 들어가 6년을 다녔다. 학업과 함께 생업에 종사하며 독립운동 후원을 했다.
1921년 리들리에서 그의 친구 김호와 김형제 상회를 시작했는데 특히 그의 능숙한 영어는 사업을 성공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넥타린’과 ‘김복숭아’를 최초로 김호와 개발하였는데 리들리에서 재배했는데 김복숭아는 크기는 복숭아보다 더 크고 씨는 작은 과일이었다. 그는 중가주의 농장지대에 전설적인 인물이 됐다. 작은 나무를 $1.25에 사서 일 년 후에 $2.50에 팔았다. 보통 나무들은 75센트였다. 한인학생들을 시간당 $1.40으로 후하게 주면서 일부러 고용했는데 어떤 학생들은 일은 하지 않고 나무 위에 올라가 아리랑 노래만 부르기도 했다. 그는 땅을 한 에이커에 2백-3백 달러에 사서 천 오 백에서 2천 달러를 받고 팔아 이익을 남겼다.
기독교인이었던 김형순은 리들리 교회를 설립하였고 나라를 찾기 위해 중경에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밤낮으로 수고했다. 한인학생과 고아와 노인, 그리고 모든 한인들을 돕기 위해 한인을 위한 장학제도를 처음 마련하기 위해 10만 달러를 희사했다. 1950년 대한인 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피선되어 국민회 사업에 열성을 다했다. 1962년 1백40만 달러에 사업체를 팔고 한인 커뮤니티를 위한 자원봉사 일을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에 달하는 1만 달러를 로스앤젤레스 한인회관 건립에 내놓기도 했다. 딸 영옥이 김호의 아들 경한과 결혼하여 김호와는 사돈지간이 되었다. 1974년까지 매년 750달러씩 한국고아원에 송금하였으며 시민권을 받지 않고 한국인으로 살았다. 1977년 92세로 사망한 김형순은 국민회장으로 장례를 지냈으며 김형순 부부의 묘지는 그들이 세운 리들리 한인묘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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