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새 활판에 새로 출간하는 새 신문을 보고 새 지식을 발달하며 새 사상을 활발하며 …… 우리 국권을 회복하고 자유의 복 누리기를 천만 축수하노라”
-공립신보 광무9년 1905년 11월 발간-
초기 한인사회는 인구도 그리 많지 않고, 여러 가지 조건이 열악했음에도 언론, 출판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별도의 언론사는 없었지만 여러 신문이나 잡지 발행에 단체나 기관에서 이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했다. 모든 출판물은 한인들을 계몽하고 항일운동 정신을 고취시키는데 목적이 있었고 한인들의 경제적 발전을 위해 서로 소식을 교류하는 매체로 그 소임을 충실해냈다. 미주에서 발행한 신문들은 미주지역 뿐 아니라 본국 및 해외 각지에서 환영을 받아 한국에까지 우송하는 한인들의 민족지가 되었다. 비록 여러 군데 흩어져서 노동을 하지만 신문을 통해 흩어진 사람들의 소식과 고국의 사정을 알고 힘을 얻었으며 유일한 대화 창구가 신문 등 인쇄물이었다.
공립신보(The Korean News)

공립신보 광무9년 1905년 11월
안창호가 창립한 샌프란시스코 한인공립협회의 기관지로 1905년 11월 20일에 창간됐다. 1907년 귀국한 안창호는 국내에서 신민회를 창건하였는데 공립신보는 신민회 기관지 대한매일신보의 국외 자매지 구실을 하였다. 공립신보는 인쇄시설이 없어 송석준 집필 하에 회원들이 손으로 써서 등사로 매주 1회 발행하였다. 1907년 4월26일에 주자를 구입하고 활판인쇄로 제2권 1호부터 국문으로 지면이 선명해졌다.
“오늘부터 새 활판에 새로 출간하는 새 신문을 보고 새 지식을 발달하며 새 사상을 활발하며 …… 우리 국권을 회복하고 자유의 복 누리기를 천만 축수하노라”라고 활자로 신문을 처음 발행하며 희망찬 의지를 밝혔다. 후에 4단 4면으로 격주 간행하다가 1907년 5월31일부터는 주간으로 매주 수요일 간행됐다.
국내에서 전개되는 일제의 침략행위를 미주지역을 비롯한 각 지역에 널리 알리고 불법성을 규탄하며 독립전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한인의 당면한 교육과 실업진흥, 독립전쟁의 준비 등을 강조하는 기사와 논설을 게재하는 등 애국, 계몽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1907년 11월 15일부터는 7단 4면 체제로 바꾸어 간행했다. 지면은 논설, 협회보, 본국소문, 외보, 별보, 기서, 광고로 나뉘어 있었다. 논설란에는 한인의 의무와 책임감을 가르치는 교육, 실업을 장려하는 글이 실렸다. 협회보에는 총회와 지방회 회원의 동정과 회의결과 보고 재정공개 등의 기사가 실렸다. 잡보에는 미주지역 한인사회의 소식이, 본국소문에는 국내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알려 조국을 잊지 않게 하고 대한제국 말기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객관적이고 정확한 판단력을 기르게 했다.
외보에는 세계정세의 변화를 실어 국제적 안목을 지니게 하였다. 기서는 미주한인은 물론 본국이나 해삼위(블라디보스톡) 등지에서도 중요한 사항이나 축하할 일에 대해 자유기고를 하게 하였다. 광고란에는 공립협회 관계 광고뿐만이 아니라 개인적 상업광고나 주식회사 주식모음 광고, 기숙사 학생모집 광고 등이 다양하게 실렸다.
서판 인쇄본 1호는 로스앤젤레스, 리버사이드, 레드랜드와 본국의 평산, 진남포 등 6곳에 지사를 두고 발간하였다. 1907년 10월 26일 공립신보 확장 취지서에는 근대국가에 있어서 신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을 문명케 하는 정치, 법률, 군대, 경창, 상업, 농업, 공업, 통신의 8요소를 다 아울러 교육하는 것이 신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일제의 탄압 때문에 언론이 자유롭지 못함을 한탄하고 내외각처에 지사를 설립하고 보급에 힘썼다.
1907년 일본이 ‘광무신문지법’을 공포하여 한국 신문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발간되는 한국인 발행신문에 대해서도 통제를 강화하였다. 발행 부수가 3천 500 내지 4천부에 달했으며 창간 후 3년 동안 1만 2천 118달러 44센트의 대금과 원조금이 수입됐다. 1908년 3월 18일자 74호부터 국내에서 압수처분을 받아 1월 29일자 114호까지 18번이나 압수되고 신한민보로 개칭된 후에도 55차 압수를 당하였다.
공립신보는 1908년 8월 12일에는 본국 소재 지사는 모두 폐쇄되고 미주와 러시아령 14개 지사만 남게 되었다. 1909년 1월 30일까지 3년 2개월 동안 117호를 발행한 후 2월 10일부터는 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로 탈바꿈한다. 공립신보의 주필은 방화중, 임치성, 송석준, 정재관, 최정익이었고 식자인은 방화중, 임치성, 이교담, 김형필이었다.
대동공보(The New Korean World)
1907년 대동공보

1907년 10월 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창간한 대동보국회의 기관신문이다. 발기인이자 중앙회 상의원인 애국적 여성 김마리사가 중심이었다. 1907년 10월 18일 공립신보는 대동공보 발간에 대하여 “상항한인대동보국회에서 기관보를 발행하는데 신문이름은 대동공보라 하고 주자는 아직 사용치 못함으로 붓으로써 속사판에 박아 우선 제1호를 출간하였으니 회원의 열성은 치하하기를 마지아니할 뿐 아니라 언론 필법이 강개격절하고 공정 유리하여 일반 동포의 문명을 선도하니 우리 미주에 있는 사회가 이같이 진보되는 것은 진실로 감사할 바이더라”라고 보도했다.
대동공보는 1호에서 14호(1907년 11월 14일)까지는 필사 석판인쇄로 하다가 1907년 11월 21일부터는 국문 활판으로 인쇄했다. 사장에는 문양목이, 주필로는 최영만이 취임하였고 미국 14곳, 한국 11곳, 중국 1곳에 발매소를 설치했다. 그 해 12월 5일 재정난으로 정간하였으나 새크라멘토와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재미교포들로부터 의무금을 받아 다시 발간했다. 그러나 25호까지 발간하고 경영난으로 다시 이듬해 4월 9일 정간했다. 그 뒤 복간되어 1909년 1월23일까지 발행한 후 2월10일부터 신한민보와 합했다. 최영만외에 장경과 문양목이 주필로 일했다.
대도(Korean Evangel)
상항한인감리교회에서 교단의 지원을 받아 미주와 한국 및 원동지방에 흩어진 한인들을 대상으로 선교와 교육을 목적으로 출판했다. 1908년 12월21일 출판했던 미주 최초의 한글 월간잡지로 결코 기독교인들만을 대상으로 출판했던 것은 아니다. 기독교정신에 입각하여 새로운 사회건설을 꿈꾸는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실어내는 역할을 했다.
통신부란에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한인사회의 소식을 전하고 교계소식을 전했다. 주필은 이대위로 매월 1회 간행하였으며 대금은 미화 15전, 6개월 선금은 80전, 1년 선금은 2원50전으로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까지도 우송했다. 대도 제1권 1호에 초대 주필 이대위는 발행축사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도(道)라’하셨으니 우리 동포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기를 바라며, 이 월보가 날로 진보하여 우리 이천만 인민에게 대도를 주시어 구원을 얻게 하소서 기도하노라”라고 했다.
대도 발행 목적은 “도덕에 합당한 글을 저술하여 도덕심을 배양하고 교육상에 유익한 글을 저술하여 교육을 장려하며 학문의 유명한 문제를 역술하여 동포의 문학 진흥을 발달시키며 재미있고 볼만한 소설을 저술하여 동포의 의량을 확충케 하며 실업에 요긴한 서적을 역등하여 동포의 실업을 장려케 하며 교회와 세계의 소식을 전하여 동포의 안목을 넓히고저 하오니 유지제군은 우리의 월보를 위하여 동심합력 하기를 바라노라”로 되어있다.
대도는 문필가를 양산해내고 미주 및 여러 한인사회의 의식을 증진시키는데 공헌을 하였고 논단과 성경공과, 교육, 도덕부 난에서는 설교와 가르침을 주었다. “누구든지 물어 볼 말이 있으면 다 물으시오. 대답할 것은 다 대답하겠소”라고 선전을 한 ‘문답편’도 있었다. ‘세계소식’난에는 당시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교회소식’난에는 감리교회 재단 소식 등 교회에 관한 소식을 실렸다. ‘동포소식’난에는 상항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소식과 공부하러 가는 학생, 사망 결혼, 병원 입원 등의 소식이 실렸다.
그 뒤 주필은 양주삼, 인쇄인은 전성덕이 맡았으며 인쇄소는 공립신보사, 발행소는 미국 상항한인감리교회당이었다. 월보 값은 매권에 50전, 반년에 80전, 1년에 1원 50전이었고 본국에도 보내주었는데 50전을 받았다.
또 대도에는 ‘문명의 인민품격에 있다’(최정익), ‘그리스도교와 문화’(박용만), ‘북미합중국헌법’(양주삼), ‘미국농민의 규모와 진취’(백일규), ‘미술의 필요’(이종찬), ‘태극기설’(백일규), ‘공예교육의 필요’(윤병구) 등 여러 분야의 글이 실려 한인들을 위한 총체적인 교양잡지 역할을 했다. 3년 동안 출판이 계속됐다.
신한민보(The New Korea)

신한민보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공립신보와 대동공보를 인계하여 1909년 2월 10일 기관지 신한민보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1909년 1월 27일 공립신보에는 “본보 명칭을 고쳐 내월부터 ‘신한민보’라 개칭하겠기로 일차 정간하고 5호 활자를 새로 배치한 후 2월 10일에 차호를 발간하겠다.”고 공고했다.
2월 10일 사설에는 공립신보와 신한민보는 “그 목적도 하나요 처소도 하나요 그 조직도 하나요 체제도 하나”라고 했다. 또한 “글자 뜻과 같이 우리 대한을 새롭게 하는 우리 국민이 신보”라고 하며 “본보를 사랑하여 읽으시는 모든 군자들이어, 나타심을 버리시고 진발력을 새롭게 하시며, 겁나심을 버리시고 강강력을 새롭게 하시며, 의뢰심을 버리시고 자주력을 새롭게 하시며, 노예심을 버리시고 독립심을 새롭게 하시오”라고 했다.
진보우익 내지 중도 합작을 대변하는 신문으로 동포의 문맹퇴치와 성인교육에 힘쓰고 동포들의 애국정신을 고취시켰다. 국권회복에 관한 기사가 많이 게재되고 국내소식도 많이 실어 국내외 항일민족 언론을 선도하고 해방 후에는 남북통일과 민족의 자유 행복을 추구했다.
캘리포니아지역의 교포의 생활상과 소식을 상세히 보도하며 1주일에 한 번씩 발간했다. 3.1운동 이후 3월 20일부터는 격일간으로 발간하여 고국과 해외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을 신속히 보도했다. 일제 당국의 감시와 간섭을 받지 않고 해외에서 발간되어 자유롭게 항일운동과 독립운동 기사를 다뤘다. 이 때문에 공립신보와 신한민보는 연해주와 북간도의 교포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고 영향력을 발휘했다. 신한민보는 국내에서도 유입되어 애독되었는데 일제에 의해 자주 압수됐다. 1910년 이후 일제치하에서는 1920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될 때까지 한국인의 신문은 하나도 없었다. 두 신문이 창간된 이후에도 제약으로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였으니 오직 해외에 신한민보만이 완전히 자유로운 위치에서 한국에 관한 사실을 제대로 보도할 수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신한민보는 3.1운동 이후 일제시대와 독립운동사 연구와 우리나라 근현대사, 독립운동사, 근대사상사, 문화교류사, 이민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처음 6년은 활자를 사용하다 1915년 3월 11일부터 이대위가 발명한 인터타잎 기계로 식자하였다.

주필은 정재관, 최정익, 이항우, 강영대, 박용만, 이대위, 김현구, 김려식, 백일규, 신두식, 홍언, 서정억, 최진하 등이었고 영문 주필은 김용중, 박상엽, 전앨른이었다. 식자인은 김형필, 김종임, 정도원, 전성덕, 최응선, 김영필, 윤성현, 한귀동, 유필립등이었다. 편집겸 발행인은 최정익으로 발행소인 신한민보사는 2928 Sacramento St.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했다. 특히 이대위, 백일규, 홍언은 신문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1909년 12월 남가주 레드랜드지방의 안석중, 이원길이 신한민보사 가옥건축 취지서를 발표했다. 재미한인사회의 신문을 유지할 방침은 가옥 신축이 필요하다고 호소하며 30달러의 기부금을 낼 5백인을 모집했다. 같은 해 10월 1일 가주 동포들의 모금활동은 좋은 성적을 얻어 샌프란시스코 패리가 232호의 가옥을 3천 500 달러에 매입하고 건관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1910년 런던에서 체류하던 이항우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5월 4일부터 신한민보를 편집하고 영문판을 설비하였으나 과다한 경비로 폐지하고 최정익이 다시 집필하였다.
1911년에는 네브라스카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운 박용만이 주필이 되었다. 신한민보는 경비부족으로 여러 번 정간을 하였는데 6개월 이상 신문을 못 낸 적도 있었다. 1917년 10월 26일 식자 기계의 변동을 위하여 419 마켓 St. 데이빗 휴스 빌딩(Hewes Bldg)에서 신한민보 일을 본 적도 있다.
신한민보는 국민회 대표회담의 결의에 따라 1942년 1월1일자부터 제 4면을 영문난으로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편집과 식자는 국민회 청년부에서 담당하였으며 ‘청년한국인의 공식 간행물(Official publications of young koreans)’이라고 표시했다. 1945년 해방 때까지는 물론 6.25사변을 전후한 시기까지 꾸준히 간행됐는데, 창간 이래 변함없이 항일민족주의 입장을 지키고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 달성에 최고목표를 두었다. 조국 독립운동의 정책에도 독립 전쟁론과 실력 양성론을 제시하여 상호 보완토록 했다. 1946년 3월 21일에는 한글 타잎쎄팅 기계를 주문했다.
◈ 1909. 6. 23: 본국에서 본보 127호와 대동공보 33호를 치안방해라 압수하였는데 본보 압수는 장인환의사의 합전(모금 계산서)을 게재하였기 때문이다.
◈ 1914. 12. 5: 학생영문보에 대하여 도와주신 동포에게 감사하오나 이제 가장 민망 되는 일은 그 수효가 많치 못함으로 만일 더 들어오지 않으면 학생영문보를 계간 할 수 없은 즉 필경 그 돈을 도로 보내주어야 할 터인데 …… 이왕 도우신 성의를 끊을 것이 실로 가석하리로다. 첨위 동포는 십시일반의 힘을 도웁기를 경요. 학생영문보 사무원 백일
<신한민보 통신기서 조례>
1. 신한민보는 일체 통신기서를 환영함
2. 주장과 논조는 본회 주의 정책에 모순되지 안이함을 요청함
3. 기서의 자수는 1천자 이내로 함
4. 통신은 정확한 사실을 요하며 발생의 일자 지점과 목적 및 이유를 밝히 쓰기를 요함
5. 통신기서의 문자를 산삭하는 권은 편집부에 있음
6. 통신기서는 중앙 상무부 총무에게로 보내며 반드시 기서인의 성명 주소를 밝히 기록할 일
7. 통신기서가 2항과 6항에 위반되면 게재를 허락지 아니 함
8. 게재하지 않은 통신과 원고는 신문사 통례에 의하여 본인에게 돌려보내지 아니함
국민보
국민회 특파원이었던 한산교는 만주를 여행하면서 바다건너 국민회 지부의 활동에 관해 보고했다. 이것이 대한인국민회의 주간신문이며 공식기관지였던 국민보(The Korea Nathional Herald)의 시작이었으며 박용만과 김현부같은 훌륭한 편집자가 있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발간된 주요 신문
독립(Korean Independence)
조선민주혁명당 미주지부에 의해 로스앤젤레스에서 1943년 10월6일 창간된 주간신문이다. 조선민주혁명당은 김원봉 등 재중국 좌익 독립운동 단체와 연결되어 있었다. 발기인은 김성권, 변준호, 최능익, 김강, 이경선, 신두식, 김혜란, 최봉윤, 황사용 등이었다.
매주 수요일 발간된 신문은 국문 3페이지 영문 1페이지로 나오다가 국문2페이지 영문2페이지로 간행되었다. ‘독립’이 창간된 무렵은 종전 후 피식민지 민족들의 지위문제가 중요한 의제로 우리 민족도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해야 할 중대한 시기였다. 그러나 해외 독립 운동 단체들 간의 갈등은 매우 심각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독립운동단체간의 갈등이 거부의 중요한 구실이 됐다.
‘독립’의 창간호에는 어떠한 특수한 단체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태어난 대변자가 결코 아니고, 이 신문의 기초가 되는 정신과 철학은 ‘공평무사’ ‘무편부당’ ‘공정’이라고 밝혔다. 이 신문은 사설, 국내소식, 전쟁소식, 해외소식, 광고문과 다양한 기고문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그러나 1945년 9월부터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에 대한 비판과 북한의 김일성과 스탈린에 대한 찬양으로 편향성을 드러내며 1946년부터는 김일성 찬양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1947년부터 대부분의 기사가 북한위주로 쓰기 시작하여 결국 미국정부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견제 강화로 1955년 12월 폐간됐다. 기독교 사회주의, 진보적 좌익과 극단적 좌익을 대변한 신문이었다.
북미시보 (The Korean American Times)
동지회는 1921년 7월 21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주사회 최대의 한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와 반목과 협조를 거듭하며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미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북미시보는 1943년 2월에 북미지역 동지회의 역량을 강화하고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기 위해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가 발행한 주간신문이다. 1946년 2월 15일 식자기를 주문하고 사업을 확장했다. 북미시보는 영문난도 만들었는데 우리 일반 동포에게 보다도 “대외 선전 상 외국인에게 우리의 정형을 만 분의 일이라도 알리고자 함이 중요한 목적이고 사명”이라고 했다. 보수우익을 대변한 신문으로 1946년 12월 15까지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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