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산같이 쌓이고 북풍은 칼같이 부는데 빈들 집 찻간에서 자며 ……”
철 도
로키산맥을 뚫고 중부로 뻗어나가는 유니온 퍼시픽철도 공사는 한없는 동양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농장의 힘든 생활은 면했으나 여름에는 녹초가 되고 겨울에는 동상이 걸렸다.
유타주의 솔트레익시 근처의 철도는 거의 한인이 부설했다.
◈ 1905.: 당시 Union Pacific Railroad 와 Southern Pacific Railroad 에서 대륙횡단 철도 부설 공사에 필요한 노동자 2만 명 모집
◈ 1905. 3.: 철도 대리인이 하와이 호놀룰루로 가서 문석홍이 경영하는 한성여관에 사무소를 차리고 5천명을 목표로 인부를 모으려고 하였다.
◈ 1906. 12.: 솔트레익 리치가 36호에 박제순이 감호여관 개업
◈ 1907. 4. 26: Salt Lake 철도일 일당은 1원 35전에서 1원 55전으로 인상
◈ 1907. 6. 21: Salt Lake 철도일 주선하는 리재수의 말에 의하면 모여든 한인 90여명이 일이 힘들지 않고 수입도 좋다.
◈ 1907. 7. 26: 덴버에서 철로 노동자 구하는 광고로 광고주는 한인의 큰 복덕방이라며 제일 일 많고 품삯 많은 곳이 철로 일이다. 철로일; 1원 50전-2원 50전(1일) 숯 굽는 일과 돌 깨는 일은 2원25전이고 숯 굽는 일은 도급하면 3-4원 이상이다.
◈ 1907. 12. 27: 네바다주 철로역장에서 한인 70-80명 일하다가 감원되어 새크라멘토로 오다
◈ 1908. 1. 15: Fresno에 전기철로신설 3년 공사 300-500명 고용 일당 1원 40전부터 시작
◈ 1908. 2. 5: 철로 일하는 동포의 고생하는 모습을 그렸다.
“눈은 산같이 쌓이고 북풍은 칼같이 부는데 빈들 집 찻간에서 자며 ……”
◈ 1908. 2. 26: 철도근로자 주선책인 신순만이 3-40명 모집 월급은 30일 다 일하면 33원
미 철도국 통계에 따르면 철도근로자 평균 임금은 85원
◈ 1908. 10. 7: Salt Lake 웨스턴 퍼시픽 철로회사 일 재개 한인 3-40명 일함. 몇백 명이라도 더 고용할 것임.
◈ 1908. 12. 9: 웨스턴 퍼시픽 철도회사 대리인 박영준 이재수가 인부 220명 모집 공가는 1일 1원 45전
◈ 1909. 2. 10: ‘철도 인부 모집/동양인 배척하여 일 못하고 한탄만 하는 동포여 오라’
백 명 이상을 모집하는데 50명 가량이면 시작하고 상항에 있는 동포도 다수 하니 기회를 잃지 말고 상항국민회관으로 오시오. 공전은 1원 60전 (40전은 먼저 주고 나머지는 넉 달 후에 준다) 만일 매일 받으면 1원 30전. 일하는 시간은 매일 10시간이고 일터는 태평양 연안으로 상항에서 16마일 떨어진 Ocean Shore 철도 회사인데 상항에서는 차비 없이 내왕한다.
상항 한인 국민회의 영업부 허승원과 김응규.
2928 Sacramento St. San Francisco, Cal
철로역사가 몹시 순조롭다. 십장이 한인에 매우 친근하다
◈ 1909. 1. 13: 네바다주 데이톤의 철도역사에서 일하던 동포 16인이 화재를 만났다.
◈ 1909. 2. 17: 오션쇼우 철도 회사에 동포 30여명이 모이다.
◈ 1909. 4. 14: 오션쇼우 철도 역사를 일공이(하루 품삯)이 1원 40전으로 허승원 김응규가 계약하였다
◈ 1909. 6. 23: ‘철도 역장 변환’신설한 오션쇼우 철도회사는 본금이 잘 들어오지 않아 역부에 공전을 더디 주므로 SP 철도회사와 수십 명 동포가 계약하였다. 캐스밸리라는 곳으로 갔는데 가주대학에서 고학하는 이대위가 여름방학동안 사무를 담당하여 김응규에서 이대위로 사무인을 변경하였다.
◈ 1909. 7. 14: 썰트 레익 학생 정희원이 철로에서 주경야독
◈ 1909. 9. 22: 시원스러운 일-오션쇼우 철도역장에서 일하든 동포가 그 공전을 찾지 못하였으므로 그 일을 주선하든 허승원씨가 중간에서 수삭(여러 달) 고통을 당하다가 그 회사 주식증서를 받아다가 은행에 전당 하였든 것을 반값에 방매하여 동포의 공가를 한푼도 영축없이 주게 되었다니 상쾌하고도 다행한 일이더라.
◈ 1910. 1. 31: 콜로라도주 프로메로 석탄광 개스 폭발, 백 여 명의 사망 중에 한인 9명 사망
◈ 1917. 7. 5: CMS Paul 철로회사; 1일 10시간 2원 47전 Grace Montana에 있는 회사
알라스카 어장
알라스카 어장에서는 연어잡이가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다. 북가주에 살던 한인들은 연어 통조림공장 인부로 나서 알라스카로 떠났다. 6월부터 10월까지 5개월 동안 한 달에 1백 60달러에서 250달러까지 받았다. 혹독한 추위에 잡아온 연어를 씻고 칼로 토막을 내는 일을 할 때는 추위에 손가락이 다 짓무르고 갈라졌다. 일이 너무 고생스럽고 힘들어 자살하는 사람도 생겼다. 알라스카 생선통조림 공장의 근로자 합숙소에 가면 퇴색한 벽에 틀림없는 한국 사람의 이름이 남아 있다고 한다.
◈ 1907. 4. 26: 알라스카는 매우 춥고 중국인, 일본인이 고기잡이 갔다가 죽고 병든 이가 많으므로 역군이 가려하지 않아 선금을 3-40원씩을 주고 모집하는데 속아서 일하러 가지 않기를 당부한다.
◈ 1907. 11. 8: 알라스카 생선잡이 간 한인 귀환/백락범, 이춘일, 정길현, 양금성, 김명수, 박기순, 하영숙, 박가현, 김현진 등 10명이 샌프란시스코 도착
◈ 1908. 4. 8: 알라스카 노동 모집/김길연 백락범(상항) 문원칠(오클랜드)이 모집하였는데 김길연이 선불을 주고 작정한자를 문원칠씨가 또 선불을 주어 데리고 가려하다가 일이 안 되자 청인이 수효가 안 찬다고 문씨 부자를 배에 실었다. 김길연 백락범씨가 모집한 사람이 50명이 넘어서 오늘 출항했다.
◈ 1908. 2. 26: ‘알라스카 인부 모집’
고가: 150원(작년에 가서 배운 이는 180원) 기간: 5개월(다른 곳은 7개월)
다른 곳은 일곱 달을 내왕하는데 본인이 주선하는 곳은 다섯 달이면 내왕하고 작년에 일인과 같이 갔던 사람 돈을 찾지 못하고 손해가 많었으나 본인 등은 신실한 보증이 있는 고로 한푼 낙제 없이 출급할 터이니 가기 작정하시면 선급도 주오니 근일 동양인 배척으로 노동도 귀한 때에 이같이 편한 일에 큰돈도 벌고저 하시면 이 기회를 일치 마시옵.
3월 그믐 안으로 상항에 내임 하시옵. 2월 26일 모집인 김길연 전명운 백
◈ 1908. 9. 16: 알라스카 어장 노동자 귀향/1908년 4월에 갔던 50여명이 5개월만에 9월에 귀향하였다. 김길연의 배에 탔던 25명 명단을 발표하고 백락범씨가 영솔하는 배도 곧 도착한다 하였다.
◈ 1908. 9. 23: 알라스카에 갔다 오던 중 양택용은 잡기로 번 돈을 날리고 배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였다.
◈ 1908. 11. 11: 알라스카에 갔던 이들이 편히 돌아옴: 정완삽, 최군신, 현승걸, 림종호, 문영수, 문원칠, 정원서, 박종걸
◈ 1909. 2. 17: ‘적한의 간사한 계교’-손병서라는 자가 씨애틀에서 차병관씨에게 알라스카 제조 노동에 가기로 하고 선금 30원과 차씨 몸에서 35원 절도
◈ 1909. 9. 15: 알라스카에 갔던 2인 귀향
◈ 1909. 9. 19: 샌프란시스코 공립회관에서 알라스카 어장에서 일하고 온 한인 환영회 개최
◈ 1909. 9. 29: ‘절지고혼’ 알라스카에 갔던 리만화씨가 고역을 견디지 못하고 기나이 어장에서 황산수를 삼키고 목숨을 끊어 류성균, 정순재, 송재봉 3인이 그곳에 매장하였다. 알라스카어장에 갔던 14인은 무사히 귀환하였다.
◈ 1914. 10. 1: 알라스카에서 무진 고생한 동포 3인 귀향
◈ 1917. 5. 24: 알라스카 어업 배에는 총 150명이 타고 있었는데 침몰로 인해 29인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망하였다. 이 사고로 한인 노동자 3인 사망하였다.
중가주 Idria에 Quick Siver(수은) 광산
수은은 몸에 아주 좋지 않은 물질로 일을 하고 몸이 아픈 사람이 많았다. 전쟁으로 수요가 급증하자 더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하였는데 초기 한인들은 몸을 생각할 여유가 없이 수은 광산에서 일했다.
◈ 1907. 9. 13: 수은광산이 호황이다.
◈ 1909. 6. 2: 오십여 년 전에 개광하여 청인만 부리다가 1907년 프레즈노 한인을 처음으로 청하였다. 박도선 김채석씨 등 45인이 응하였다. 프레즈노에서 60리가 되는 산곡에 있는 Idria Quick sliver Mining에서 약 20명의 한인이 신용을 얻으며 일하고 있다. 첩첩산중 적막한데 외로운 나그네의 비창하여 …… 화답하는 자 없다. 이곳에 한인이 일한 후로 백인 노동자와 멕시코 노동자가 시기하여 서로 쟁투지경에 이르면 감독과 십장이 한인을 특별히 보호하고 지극히 사랑하여 그들의 자애한 은혜에 감사하다.
◈ 1909. 5. 19: 수은 광산의 한인들 협회에 연금(한영호, 강창헌, 엄성칠, 김지경, 리봉운)
◈ 1917. 6. 7: 임금인상-작업시간 10시간에서 8시간으로 단축하여 주었고 음식을 지어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다
석탄광산
초기 이민들은 와이오밍에 슈피리올의 석탄광산에서 많이 일했다. 1908년 8월 23일 신한민보에는 Rock Springs 탄광과 한인 수십 명이 계약한 내용이 실렸다. 한인은 무제한으로 환영하고 1일 8시간 일에 1월 80-90전하던 것을 3원 10전에서 40전으로 올려주었다.
석탄 씻는 일은 한 톤 당 21전하던 것을 26전으로 석탄 캐는 일은 50전에서 63전으로 인상하여 주었다. 이런 노사합의로 잘하면 하루에 4-5원 벌이가 되었다. 최의성은 1906년 하와이 마우이 농장에서 일하였다. 1907년 12월 와이오밍 롹 스프링스 탄광에서 일하던 그는 석탄채굴 중 굴이 붕괴하여 당시 2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909년 6월 와이오밍에 Savery 석탄광산에서 일하던 이태석은 중산을 입어 같이 일하던 한인들이 도왔다는 기록이 있다. 1918년 노동주선인이 신문에 낸 광고에 의하면 8시간 바깥에서 일을 하면 4원 40전이고 굴 안에서 일을 하면 5원 42전이었다. 석탄 캐는 일은 시간 당 매 톤에 77전이고 나르는 일은 매 톤에 49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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