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에 미주 한인은 망명, 도피 또는 유학으로 비교적 계획적이고 자발적으로 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일시적인 체류나 망명이 끝나면 언제든 돌아갈 것을 전제로 하고 살았다.
나라 없는 백성으로 나라의 독립을 바라는 그들은 문학의 모습이나 연극의 모습을 빌어 갖가지 천대와 멸시를 받고 생활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글을 쓰고 연극을 했다. 조국과는 달리 표현의 자유가 주어졌던 초기의 이민문학과 예술세계를 돌아보는 것은 이민역사에 중요한 부분임에 틀림없다. 미주 한인 이민자의 문학작품은 사용된 언어 즉, 국문과 영문 두 가지로 일단 나눌 수 있다. 그러기에 미주한인문학을 한국문학으로만 다루기엔 무리가 있다.
당시 대부분의 문학 발표무대는 신한민보였다. 당시 대한인국민회는 외국에서 한국을 대표하던 유일한 기구였고 신한민보는 미주지역 한인공동체를 대표하던 대한인국민회 기관지였다. 자연히 대부분의 미주에 살던 지식인이 신한민보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고 삼일운동이나 독립운동에 대한 재평가나 반성 역시 신한민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문학의 내용이나 주제도 ‘교육과 실업의 진발, 자유평등제창, 동포의 영예증진, 조국의 독립과 광복에 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러다 숭실대 조규익 교수의 노력으로 초기 이민 문학이 빛을 보게 됐다. 신한민보에 발표된 글들을 피 묻은 신음이라고 말하는 그는 “누렇게 바랜 채 바스러지는 신문지 쪽과 너덜거리는 책갈피 속에 눈빛 시퍼렇게 살아있던” 작품이라고도 표현했다.
현재 남아있는 한인 이민 작품은 수백 편의 시가와 수십 편의 소설 및 희곡이다. 일부 작품들이 영문으로 쓰여 한국 문학 범주에 넣기가 애매해 보이나, 영문 작품도 표기만 그럴 뿐 상당부분 주제의식 등장인물이 한국의 것들임을 들어 조규익 교수는 우리문학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포용되길 바란다고 했다. 특히 연극은 해방 전 미주 한인공동체의 문예생활에 큰 부분을 차지하였으며 시대가 요구하는 현실적 목적을 효과적으로 수행함으로 한인공동체의 정체성 확립과 정서적 결속에 큰 기여를 했다. 아직도 연구해야 할 부분이 너무도 많은 분야로, 이 장에서는 조규익 교수의 책과 여러 참고 문헌 및 신한민보를 통해 적어도 생각과 사상에 구속 받지 않았던 초기 이민의 문학과 예술세계를 돌아보기로 한다.
이민문학
구세계와 신세계의 체험의 차이는 이민들의 갈등의 요인이자 문학적 형상화를 자극하는 원동력이나 문학적 원형으로 작용하였다. 초창기 국문문학은 이민문학의 중요한 부분이면서 영문표기 이민문학을 연결시켜주었다. 구세계에서 탈출한 주인공이 신세계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겪는 갈등과 좌절의 체험들은 특히 소설에서 이민문학의 공통점이다.
Gary Pak의 A Rice paper Airplane과 김난영(초기 이민 비행사 한 장호의 부인)의 Clay Wall은 좋은 예이다.
전자는 죽음을 앞둔 주인공 김성화가 조카뻘인 용길을 만나 험난했던 과거를 술회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있다.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집착, 그리고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그의 욕망은 일제 세력에 대한 반항과 항일투쟁을 거쳐 하와이까지 오게 되었지만 일본인에서 미국인으로 바뀌었을 뿐 그를 압제하는 세력은 여전히 참담한 비극으로 부각된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일본으로 그리고 하와이로 전전해 온 혁명가 김성화. 다시 조국으로 귀환 하고자 하는 꿈은 실현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 휴먼스토리이다.
창작시점은 해방 후이고 서술자의 발화시점은 1928년 2월이다.
김난영의 Clay Walls도 마찬가지로 이민 1세대 주인공 혜수가 신세대에서 겪는 시련과 투쟁과 좌절을 그려내고 있어 이 작품은 단순히 혜수라는 주인공의 개인사가 아니라 한인 이민 전체의 역사적 서술서이다. 아이를 낳아 키우며 신세계에 적응하는 것은 구세계로 귀환하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결국 귀환의 꿈을 이루지만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파괴된 구세계는 이미 신세계로 바뀌어 있었다.
다시 복귀한 신세계(지금의 구세계)로 복귀한 미국에서 이전보다 혹독한 시련을 받으며 작품후기에 마지막 부분에서 작자는 남북한으로 분단된 구세계의 현실을 제시하고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없어 귀환을 포기하고 그냥 눌러 앉을 수밖에 없는 한인이민들의 강요된 선택을 결론으로 내놓는다. 즉 혜수가 몸담고 있던 진보개혁 한인회를 남한정부에서는 공산조직으로 낙인찍혀 그녀는 남한으로 갈 수가 없다. 다른 것은 다 놓아도 구세계 귀환의 거점으로 삼고 있던 곽산의 땅마저 공산치하 북한에 있기 때문에 그녀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역설적인 상황을 제시했다.
남북한으로부터 모두 배척받던 한인 이민들의 곤경과 역사의 아이러니를 그려내고 있으며 구세계의 귀환도 신세계의 적응도 동화도 불가능하거나 최소한 쉽지 않았던 이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초기 이민문학은 소재 주제 구조가 자서전적 경향이었으며 그것은 이민 첫 세대들에 의해 영문으로 쓰인 단행본 규모로 첫 장르였다. 초기 이민 아시안 중에 세 명의 소설가를 뽑자면 강영길, Richard E Kim과 김영익으로 세 명 모두 한국 사람이라고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1936년 7월 19일자)는 보도했다.
시 가
초기 이민의 시기에 건너온 한인들의 경우 농민, 노동자 등이 대부분이어서 전통문화나 생활 속에 노래로 부르던 전통시가를 지속시키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신한민보를 주도하던 지식인들도 구미의 시 양식론을 이용하긴 했으나 창작에 있어서는 전통시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20년 중 후반에 국내문단의 문학운동의 하나로 시조 부흥론을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이 펼쳤는데 미주 한인사회에서는 국내보다 훨씬 전부터 이런 운동이 있었다. 1918년 이후 창가나 국문 시 모집광고를 통해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국문시 운동을 전개하려던 신한민보는 전통시의 구조를 영미시의 이론을 원용하여 합리화하고자 노력했다.
당시 본국에서 많이 불리던 노래 형태인 창가는 미주 한인사회가 동포들을 계몽시키기 위해 도입한 장르로 국권회복의 의지와 실향의 서러움을 노래로 표현하였다. 시가에 있어서는 이민들은 두 부류로 나뉘는데 전통장르를 노래한 인사들과 새로운 실험을 통해 변용을 시도한 인사들이다. 그러나 내용이나 주제가 무엇이든 결국은 구세계에 대한 그리움과 일본세력에 대한 노여움과 회복에 대한 공통된 염원으로 표출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창립 기념노래(시가)>
즐겁도다 이날이여 협회창립 된 날일세
우리동포 공합하야 단셩립 하였고나
깃뿐날 깃뿐날 공립협회 창립한날
우리들의 노래소리 한곡됴로 놉혀보세
◈ 1914. 7. 30: 이달 26일에 본항(샌프란시스코)에 재류하는 한인문인 시객들이 금문공원에 있는 스트로베리산상에 재회하여 시회를 열었는데 금문공원에 있는 화초와 금조들이 비로소 주인공을 만났다는 풍설이 있다더라.
◈ 1914. 8. 6: ‘한국문풍월’경연대회가 ‘꽃’을 시제로 열렸다. 31장에 달하는 글이 들어왔는데 그중 당선작이 다음과 같다
*1등 샌프란시스코 일녀사: 비단같이 고옵고 맑은 향내 없으면 봄바람에 피어도 누가 사랑하겠노 *2등 다뉴바 손건: 봄빛을 사랑하고 희고도 붉었으니 빙긋이 웃는 태도 그 누가 물들였노, *새크라멘토 리언: 붉은 입순 반 열고 능히 나비 부르니 소리 없이 우셔도 네 마음을 뉘 아노, *써니베일 구연성: 고운 얼굴 숙이고 아침이슬 찬나뷔 수물 밑에 숨어도 향내조차 그 길로.
◈ 1915. 2. 24: 서적광고
국한문책-초등식물학(30전) 헌법요의(37전) 대한지지(42전) 국가사상(27전) 대한역사(70전)
국문책-십삼도 유람기(일질 40전) 국민개병설(50전) 국민독본(헝겊두껑 1원, 종이뚜껑 80전) 영어독학(25전) 군인수지(1원) 동국위인 최도통전(매권에 35전) 신한민보사 고백
◈ 1918: 미주 창가모집
1. 보통 4절 이내 2. 후렴을 겸하면 3절 이내 3. 순국문으로 요구함 4. 창가의 명록을 요구함 5. 신구조간의 다수를 요구함 6. 작자의 성명이나 별호를 요구함 7. 기한은 1918년 8월 10일로 정함. Korean Song Publishing Office 212 Marchesault St. 로스앤젤레스
◈ 1948. 6. 17: 본보 주필 홍언씨는 중국의 항일시기 각 신문에 기재한 논설과 시를 출판할 것을 준비하기 위하여 6월 10일 상항에 전왕하여 수일 체재하다가 13일 나성으로 회환하였다.
도산이 지은 노래도 수십 편이 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의 애국가와 거국가 그리고 흥사단가가 유명하다. 거국가는 도산이 1910년 4월 망명하기 전에 망명을 예시하며 지었다. ‘거국행’ ‘한반도작별가’ ‘간다간다 나는 간다’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노래는 1910년 대한매일신보에 소개되었고 이후 국외 동포사회로 번져나가 1915년11월 11일자 미주 신한민보에도 소개되었다. 4절로 이루어진 이 노래가 민족사립학교에서 애창되자 조선총독부에서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거국행 신도’라고도 불린 이 노래는 암암리에 전국으로 퍼져 골목마다 유행가처럼 울려 퍼졌다. 여기서 신도란 하와이를 일컫는다.
도산은 변함없는 애국심을 노래한 우리나라(6절), 우리 국토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노래한 한반도가(6절), 독립을 노래한 단심가(1절),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학도가(4절), 흥사단 전파를 위한 항해가(4절), 민족교육 학교에서 많이 불리어진 혈성대(7절), 동명성왕, 을지문덕, 이순신의 빛나는 업적을 노래하여 애국심을 자극하는 격감가(4절)등의 노래를 만들어 애국정신의 사상을 심어주었다.
한편 1936년 안익태가 작곡한 ‘대한애국가’의 작사 “동해물과 백두산이 ……”도 도산이 지었다고도 하는데 윤치호가 했다는 설이 더 많은 것은 당시 신한민보에 윤치호 작사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거국가 (총 4절)>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가게 하니
일로부터 여러 해를 너를 보지 못 할지나
그 동안에 나는 오직 너를 위해 일할지니
나간다고 설어 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
(이하 생략)
<흥사단가>
조상 나라 빛내려고 충의 남녀 일어나서
무실역행 깃발 밑에 늠름하게 모여드네
부모국아 걱정 마라 무실역행 정신으로
굳게 뭉친 흥사단이 네 영광을 빛내리라
<단심가>
(공립신보 3월 11일-‘우리 한국의 앞날’로 3시간 50분 연설 뒤에 끝맺음 한 가사)
어여 지야 어서 가자 모든 풍파 무릅쓰고
문명계와 독립계로 어서 빨리 나아가자
멸망파에 든자들아 길이 멀다 한탄 말고
희망가를 굳이 꽂고 실행 돛을 높이 달아
부는 바람 자기 전에 어야 지야 어서 가자
<환영가>
(신한민보 1918년 8월 8일-미주지방에 산재하는 동포들이 도산 선생의 방문환영을 위해 지은 노래로 찬송가 162장에 맞추어 불렀다.)
1. 즐겁도다 오늘날에 귀한 선생 만났세라 길고 오랜 장마 날에 청천백일 빛이 난 듯 (후렴) 선생을 선생을 오늘날에 모셨세라 높은 덕을 사모하여 한 곡조 노래하세
2. 경애롭다 우리 선생 충의 열성 간절하사 모든 곤란 모든 풍파 날로 길이 받았고나
소설
초창기에는 시가와 마찬가지로 현실을 반영한 소설들이 주를 이룬다. 소설이 시가와 마찬가지로 민중의 계몽에 가장 유용한 장르로 자연스럽게 애국심이 주제의식으로 나타난다. 일제 항의 검열로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었던 본국과 달리 미주지역은 표현의 강도 면에서 자유를 누리며 현실의 목적의식을 마음껏 담을 수 있었다.
재미한인 1세대들의 작품은 삼일운동 이전이 소설은 주로 낭만적 애국주의가 주제의식이고 삼일운동 이후의 소설들은 계몽의식과 애정 등 인간심리나 현실문제의 추구 등이다.
신한민보에는 매호 빠짐없이 본국으로부터 수입되는 서적들에 대한 광고가 실리곤 했는데 북미 소년서회나 태백서관 서점 등이 책들을 수입하고 광고하였다.
3.1운동 이전의 소설작품은, 순수한 전쟁을 통하여 애국정신과 방법을 보여주고자 했던 ‘애국자 성공’, 전쟁과 사랑이라는 주제로 애국정신을 형상화 하려했던 ‘텰혈원앙’, 애국과 사랑의 두 축을 중심으로 남녀 간의 만남과 헤어짐에 따르는 고통의 과정과 식민지적 현실과 당위성을 묘사한 ‘남강의 가을’, 일본군에 잡혀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남편과 아버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긴박한 위기적 상황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그린 ‘난쳐난쳐’등이 있으며 남녀의 결연담과 첩보담이 하나로 합쳐 전대되는 ‘옥란향’은 긴박감과 긴밀한 짜임새가 소설적 완결성을 보여주고 있다.
신한민보에 실린 해방 전 작품은 대략 30편으로 3.1운동 이전의 소설들은 20작품에 가깝다. 3.1운동 직전부터 1920년 말까지 2년여 동안 소설작품은 실리지 않았고 순수 창작소설이 1921년부터 등장했다. 1941년 이후 해방까지의 기간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3.1운동 이후의 소설은 차분한 계몽의식과 함께 애정 등 인간의 심리나 현실문제에 대해 추구하였다. 작가로서의 전문성보다 한일합방으로 손상된 자존심을 보상받으려는 지식인들의 욕망을 소설형식을 빌려 쓴 것이 31운동 이전 작품이고 합리적인 대안이나 인간의 내면을 형상화하려 한 것이 3.1운동 이후의 경향이다.
한인들이 겪은 문화적 충격의 하나가 애정모럴이다. 작자는 작품 속에 그것을 드러내며 나름대로 어떤 모델을 제시하려는 의욕을 보여준다. 민족적 현실에 본국의 소설문학과 현지의 새로운 체험을 통해 쓰인 소설은 3.1운동이후 해방 전 작품은 모두 13작품이다.
투쟁정신과 애정윤리가 미적으로 드러난 작품은 ‘고향의 꿈’ ‘동지’ ‘무덤에 정을 붓쳐’ ‘원정대’ ‘돌 먹는 사람들’ ‘새벽길’이다. 전통적 애정 모럴의 변이와 지속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적 본질을 탐구한 작품은 ‘사랑하는 누님께’ ‘자유혼인’ ‘현미경’ ‘해당화’등이다. ‘특이’는 인종적 편견과 빈부격차등 사회의 모순에 비판적 주제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채로운 것은 본국의 문단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성향의 ‘사랑의 빛’과 ‘탈선의 최후’등 종교소설이 나온 점이다.
조규익 교수는 ‘해방 전 재미한인 이민문학’이라는 책을 통해 초기 이민들이 쓴 소설 작품들이 본국에서 등장한 소설 못지않게 작품성을 지녔다고 보아 다각적 평가를 거쳐 우리문학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1909. 8.25: 재미동포 중 유지제씨가 사회지식을 발전하기 위하여 ‘소년서회’를 성립하고 각항 서적을 출판하기로 하였는데 우선 내지(본국)에서 압수당한 서적 중 ‘금수회의록’이란 소설을 본사에 위탁하여 출판하였으니 동포는 다투어 구람하시기를 깊이 바라노라.
◈ 1914. 8.25: 정치학에 고명한 안국선씨가 저술한 ‘금수회의록’은 이상 소설로 볼수록 재미있고 국문으로 만들어 보기가 쉽다. 당시 한국에서는 압수당한 책으로 가격은 한 권에 25전이다.
문학활동
194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김창순, 이창희를 중신으로 정치성을 배제한 교육, 문학, 과학을 위주로 하는 ‘한미문화협회’가 창립되었다. 미국 사회의 여러 지도자들이 고문으로 추대되었는데 이중에는 앨버트 아인슈타인도 끼어 있었다. 그는 한미문화협회의 장학기금 분과 명예분과 위원장이었다.
이 단체의 목적은 한국문화를 포함한 동양문화를 미국사회에 전파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관련된 논문과 서적을 번역해 각 도서관에 분배했는데 이것을 계기로 미국 대학교에 한국 도서실이 생겼다. 1943년 5월 4일 미국대학 중에 하와이 대학이 제일 처음으로 한국도서실을 설치하고 1년 후에는 캘리포니아 대학에 생겼다.
주요작가와 출판
◈ Peter Hyun
*Man Sei!(만세)
1906년에 태어나 한국 탈출과 중국 상해로 건너가 상해에서의 삶, 중국 상하이에 살다가 1924년 17살 때 하와이로 이민을 와서 살 때까지 17년간의 자신의 이야기를 쓴 자서전이다.
*In The New World-The Making of a Korean American
‘만세’에서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썼으며 이 책에서는 어른이 된 후의 이야기를 쓴 자서전이다. 독립운동과 목회에 투신했던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삶, 미국 이민으로서의 첫 걸음, 미국에 적응하는 삶 등은 초기 이민자의 삶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1930년 1940년대에 동양인이 철저하게 무시되고 차별 받던 시기에 미 주류사회에서 많은 연극을 연출하였다. 연극 연출로 뉴욕과 보스톤 등지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음에도 배우들의 보이콧으로 오래 정든 극장을 떠나야 했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연극에 매달려 성공한 그는 그가 받은 인종차별로 30년간을 고민했다.
그러다 그 이유가 새로운 문화에 대한 무시와 자기의 문화가 드러나는 것에 대한 공포에 기인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결국 미국사회에 한인이 되는 길은 ‘문화의 결혼’이라고 말하는 그는 어려서부터 다른 문화를 서로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로 다른 문화를 배우고 익혀 후세들에게는 차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부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 글이다.
◈ Charr, Easurk Emsen
1918년 4월 5일 차이석이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에 ‘The Golden Mountain’을 펴냈다.
◈ Koh, Taiwon: The bitter fruit of Kom-pawi
◈ 백인덕: September Monkey
◈ 유일한: When I was a boy in Korea
◈ Lee, Mary Paik: Quiet odyssey
Korean-American Author
◈ 강영길(1903-1972)
1903년에 북쪽에서 태어난 그는 동양이민금지법이 시행되기 바로 전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18살에 오직 4달러를 가지고 뉴욕으로 갔지만 그는 서구문명을 배우고 싶은 욕망에 가득 차 있었다. 학교를 다니며 하우스보이, 웨이터, 접시 닦기, 식품점 점원 등을 했다. 캐나다에서 학교를 마치고 하버드대학에 입학하였다.
1933년에 ‘The Grass Roof’ 와 ‘East Goes West’를 썼다. 한국동란 중에 남한군으로 참여하였다. 강영길은 인종갈등과 반민주적 강요에 강하게 반대하며 소수민족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
만 오천 권의 책을 서울에 있는 한국 학생들을 위해 한국 대학 도서관으로 보냈다.
고 펄벅여사는 “강영길은 뛰어난 작가이며 교수로 동양의 가장 총명한 마음을 가진 사람중의 하나이다.”라고 칭찬하였다. 강교수는 구겐하임 상과 여러 유럽문학상을 받았다.
◈ Kim, Richard E: The martyred-창씨개명을 하게 된 일제치하의 탄압을 고발하는 내용
◈ 김난영: Clay walls
◈ Jones, George Hebert는 한인들의 초기 이민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썼다.
‘Koreans Abroad’ ‘The Koreans in Hawaii’ ‘Koreans in 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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