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미주 한국인의 영화와 연극 예술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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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과는 달리 미주사회의 한인들은 무제한의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희곡이나 연극을 주도한 인사도 역시 신한민보의 핵심인 동해수부(홍언)이나 백일규였다. 이들은 한인사회의 연극을 주도하였으며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많은 소규모 연극들이 공연되기도 했다.

연극을 지탱하는 두 요소는 긴장과 갈등이며 그 표현은 모방과 보여줌이다. 연극은 인간의 삶을 통해서 목격할 수 있는 이런 모든 요소들의 통합체라고 할 수 있다.

시나 소설이 간접적이라면 연극은 직접적이다. 미주 한인 지도자들이 동포들로 하여금 애국의 정신을 통하여 그들의 정체성을 확보하는데 연극보다 더 효율적인 장르는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한일합방후의 팽배하던 항일정신과 복수심이 3.1운동 이후 자신들의 현실과 내면을 직시하고 삶의 모습이나 문제점을 연극으로 성찰하려 했다.

작품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1910년대의 것이 ‘반도영웅’ ‘동포’, 20년대의 것들은 ‘시대의 희생’ ‘열혈’ ‘우리나라 만세’ ‘초로인생’등이며 30년대 작품으로는 ‘돈만 아는 세상’ ‘열세집’ ‘타향의 30년’등이다. 또 40년부터 해방 직전까지의 작품으로는 ‘무궁화’ ‘한국청년 젼디공작대의 비장한 연극’등을 들 수 있다. 작품의 성격으로 보면 10년대의 작품에는 완벽한 승리를 통하여 일본을 징계하는 내용들이 형상화되어 있는데 한일합방의 충격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20년대의 작품들에는 3.1운동의 회고와 반성, 식민지하의 빈궁이 그려있고 30년대에는 조국애, 이민생활의 애환이 나타난다. 40년대에는 급변하는 시국을 반영하듯 투쟁적 성향으로 바뀐다.

‘반도영웅’과 ‘동포’는 ‘신편인극’과 ‘신무대’의 장르표지가 붙어있는데 이 말은 당시 한인사회에 실제로 무대에 올려진 작품임을 나타낸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공연된 연극

◈ 신한민보 1914년1월1일자에서는 1913년 12월 24일 밤 한인교회에서 거행된 ‘구주탄일경추예식’에 관한 소식을 전하며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였다. “희대(연극)에서 노름하는 일을 할 때에 죄인이 회개하는 일과 교인들이 면류관을 받는 일과 외국사람이 전도하는 일 같은 재미있는 일이 많았으며 내빈은 남녀동포 다수가 참석하였더라.”그 기사 다음에는 연극 ‘신무대’의 내용이 요약 제시되어 있다.

ㄱ. 숙성한 교우의 훌륭한 정성, ㄴ. 그리스도 군병의 찬송하는 소리, ㄷ. 아름다운 성도의 영광이 찬란한 월계화관, ㄹ. 마귀의 눈물 (제1막 마귀의 눈물, 제2막 맹회두의 불행, 제3막 가정의 파락, 제4막 천사의 날개), ㅁ. 백인 전도사가 한국말로 전도, ㅂ. 청인 전도사의 청어 강도.

◈ 북미지방총회 총부회장 취임식이 1914년 2월28일 본 총회관 내에서 열렸는데 여흥순서로 연극이 공연됐다. 신한민보는 3월5일자에서 본항(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남녀동포들이 일제히 참석하였고 취임식을 행한 후에 여흥으로 ‘신무대 태극기’라는 하는 연극을 재미있게 구경하고 다과를 나눈 후 동 12시에 각각 집으로 돌아갔다고 보도했다. 또 동 신문은 이 연극에 대한 내용을 간략히 싣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신한민보는 몇 차례에 걸쳐 연극에 관한 기사를 싣고 있다.

◈ 1914. 9.10: 연극의 희문이 풍속개량과 정신고취에 필요함 인류사회의 동작하는 모습을 글로 쓰고 말로 전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감동하기 쉽게 하며 재미있기 쉽게 함이라. 문명한 나라 사람들은 미술의 능력으로 연극장을 화려하게 하여놓고 인민을 즐거워하게 하여 마음을 활동케 하니 연극은 보통 교육의 한 부분이라.

◈ 1916. 2. 8: 단기 4249년 경축기념일과 대한인국민회 창립 제7회 기념식 기사

이번 예식은 연극에 힘을 많이 들인 고로 시간을 경제하기 위하여 예식은 간략하고 엄숙함을 주장하야 인하야 폐식하고 제2식을 공포하니 제2식을 맡은 홍언씨가 ‘반도영웅’이라는 연극문제를 내어 걸고 국민무대를 열어 놓는다. ‘반도영웅’은 연극의 이론과 창작에 이르기까지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는 홍언의 작품으로 내용을 확인 할 수 있는 최초의 작품이다.

제1막 불쌍한 노인, 제2막 기특한 차돌이, 제3막 내가 누구뇨, 제4막 애정과 전쟁.

◈ 1929. 5. Korean Student Bulletin: 중가주의 리들리 연극팀의 오페라 공연/8살부터 15살로 사이의 10명의 소녀와 5명의 소년으로 구성 된 리들리 연극팀이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에 사는 사람들이 만원을 이룬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에서 ‘Life Like Morning Dews’라는 오페라를 공연하였다. 잘 지도된 연기와 아름다운 노래는 많은 공감을 주었다

◈ 1943년 11월11일자: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에서는 10월 31일 뮤지컬 훼스티발을 열었다. 프랜시스 황, 베티 리, K.리. S 리, H. 김 외에 5명의 독주와 프랜크 리가 성가대와 함께 하였다.

Peter Hyun의 활약

1924년 17살에 미국에 온 피터 현은 하와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디아나의 De Peuw 대학에서 철학과 연극예술을 공부했다. 1930년 매사추세츠 극장에서 열린 하계 프로그램에 참석하여 열정을 키운 후 뉴욕시 극장 무대담당 보조 매니저로 일했다.

그 극장이 문을 닫자 캠브리지에 ‘The Studio Players’ 극단으로 가서 1931년 10월 입센의 ‘When We Dead Awaken’으로 데뷔했다. 12월에는 ‘Shaw’s Great Catherine’을 연출하고 1932년 2월에는 체콥의 작품 ‘Uncle Vanya’를 그리고 4월에는 ‘Qintero Brothers’ Fortunata’ 를 연출했다. 압도적인 그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을 한 배우들이 그의 연출을 거부하는 일이 생기자 그는 커다란 충격을 입는다. 하와이로 돌아온 그는 카와이에서 ‘Cane Fire’를 찍으며 자신이 직접 역을 맡고 배우가 된다. 1933년에는 코네티컷 하트포드에 있는 극장의 무대 매니저로 있었다. 1935년 ‘New York Federal Theatre’에서 연출한 ‘Ferdinand The Bull’은 굉장한 성공을 거두어 ‘New York World’s Fair’에서 테잎으로 상영되었다. 뉴욕과 매사추세츠 캘리포니아 그리고 캐나다 몬트리얼에서도 연출을 한 그는 1930년과 1940년대 극장에서 몇 명 안 되는 소수민족의 한 사람으로 커다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평생 자신을 따라붙은 ‘차이나 맨’이라는 인종차별을 겪으면서 주류사회에 아시안 그리고 코리언의 재능을 알리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는 초기 이민의 애환을 그린 ‘만세’와 ‘In The New World’ 2권의 저서를 남겼다.

영 화

남가주의 할리우드는 영화의 본고장으로 일찍이 도산 안창호의 장남 필립 안이 배타적인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한국인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1936년 미 영화계에 진출하여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와 TV 시리즈 ‘쿵후’에서 신비의 무술을 가르치는 소림사 도사 역을 맡았다. 이 시리즈는 방영기간이 4년을 넘었다.

그는 아버지 도산 안창호가 상해 임시정부와 독립을 위해 중국과 한국에 나가 있어 맏아들로서 가정을 돌보아야 했다. 그는 트럭 운전사로 빌딩청소로 접시 닦기로 신문배달로 막일을 하며 아버지를 원망도 했다. 그래도 “너만은 좋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며 USC에 재학 중일 때였다.

마침 영화사에서는 USC 풋볼 팀이 출연하는 영화 제작에 엑스트라를 모집 중이었는데 필립안도 면접실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복도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서성대다 마침 그 옆을 지나던 감독 Lewis Milestone과 부딪혀 그 순간 그의 영화로의 길은 열리게 되었다.

중국인 역을 맡을 조연배우를 물색 중이던 감독과의 만남으로 그는 그의 처녀 작품인 파라마운트 영화사가 제작한 ‘Anything Goes’가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세계대전 당시 미국사람들은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전쟁영화를 많이 만들었는데 그는 영화에서 동양인 적군 역을 도맡아했다. 목소리가 좋고 완벽한 영어를 구사한 필립 안은 오디션을 통해 발탁되어 단역으로 시작하였으나 미주에서 대표적인 동양계 배우가 되었다. 40여 년간 헐리웃에서 3백여 편의 영화와 TV에 출연하였다.

그는 1905년 3월 28일 LA에서 출생했는데 미주 이민 한인 2세 중 제1호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사병으로 입대하여 태어난 나라에 충성을 하였다. 평생을 총각으로 지낸 그는 파노라마시의 명예시장으로 20년간 커뮤니티를 위해 봉사를 하였으며 한국과 월남전에 미군을 위문하러 전쟁터를 찾은 유일한 한인 계 배우였다.

1978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는 가난과 인종차별의 벽을 뛰어 넘어 초기 이민에 희망을 준 위대한 한인 2세였다. 1984년 11월 14일 로스앤젤레스 헐리웃 명성의 거리(Walk of Fame)에 작고한 필립 안의 별을 붙이는 행사가 화려하게 열렸다. 톰 브래들리 사장은 그 날을 필립 안의 날로 선포했다.

◈ 1959. 1. 29: 대한인국민회 창립 50주년을 맞아 안창호의 아들 안 필립이 기념사를 하기로 하였으나 ·영국 런던으로 활동사진을 만들러 갑자기 가게 되어 기념식에 참석 못하게 됨을 유감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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