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초기 이민 한국인들의 음악과 창작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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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샌프란시스코 한인 학생 밴드 11명이 제 5회 국민회 기념식에서 연주하였다.

◈ 1936년 3월 26일 애국가의 탄생: 일본 동경에서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평양에서 고별 연주를 끝낸 안익태는 1930년 초 음악연구 차 미국에 당도하였다. 미국에서 첫 주일 예배를 상항감리교회에서 드리며 예배시간에 첼로 연주를 하여 교인들은 큰 감명을 받았다.

당시 고국을 그리던 사람들은 감격으로 스코틀랜드 민요에 “동해물과 ……”로 시작되는 가사를 붙여 애국가를 다함께 불렀다. 안익태는 이때 이 불멸의 애국 가사에 한국의 혼에서 흐르는 음률을 붙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애국가를 작곡하는데 샌프란시스코에서 감격과 영감이 그 동기가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 1933년에는 샌프란시스코 한인 학생들은 한 달에 한번 음악 프로그램을 갖고 음악과 합창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 1933년 11월 23일 8시 반에는 뉴욕 500 Riverside Dr.에서 안익태의 첼로 리사이틀이 열렸는데 입장료는 1불50전이었다.

◈ 1933년 12월 24일 시카고대학에서 열린 11개국의 동양학생대회에서 김매리의 가야금연주가 인기를 모았다.

◈ 1936년 3월 26일에 5년 전에 미국에 와서 필라델피아에 거주하고 있던 음악가 안익태가 ‘대한애국가’의 작곡발표가 있었다.

◈ 1954년 4월 9일 본국으로부터 봉숭아합창대 일행 38명이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세인트 프란시스 호텔에 사흘 동안 유숙하고 인근각처의 초청을 받았다. 7세부터 12세까지 여아 22인과 남아 3인으로 미국 방문 목적은 한국전쟁 고아들과 그들의 교육을 위하여 천만 달러의 자금을 모으려는 것이었다. 뉴욕 시카고 대도시를 돌며 2백 27회 공연을 하여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다. 19일에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와서 일주간 묵으며 다시 각처의 초청을 받았다.

◈ 1958년 2월 2일 남가주 버뱅크시에 쟌 뻐로 공회당에서 음악가 안익태씨가 버뱅크 교향악단을 지휘하였다. 스페인을 중심으로 유럽 각 도시에서 교향악 지휘자로 명성이 높았던 그는 전 미주와 하와이에 순회 공연하는 중이었다.

무 용

◈ 1937년 12월11일 한국의 전설적 무용가 최승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공연하였다.

◈ 1948. 3. 25: 고국 가무 연주단 ‘조선 무용단’8인이 상항에 안착하자 한장호, 황성탁, 이용준이 오클랜드와 상항 유람을 시켜 주었다. 각 지방을 순회하며 연기하였다.

체 육

◈ 1933년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한인 학생간의 농구 친선게임이 연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 1947년 4월 19일 보스톤시에서 제51회 마라톤 경주를 하였는데 한국서 온 서윤복씨가 1등 상을 받았다.

◈ 1948. 5. 27: 신리치군 허니문에서 손바람을 내여-“국민회 상항 지방회 지방위원장 신달윤씨 동부인의 3자 리치군은 결혼 후 허니문에서 돌아와서 뉴욕 캐나다 각지를 유람하며 6개월이나 감밀한 시광을 보내는 가운데 도처 링 싸이드에 권투선수와 시합하여 누차 승리를 얻어 대환영을 받고 5월 9일 상항에 돌아와 부모님을 모시고 있다더라.”

◈ 1948년 런던 올림픽대회에서 이순기씨의 외아들로 한인 2세인 새미 리박사가 미국대표로 출전한 10미터 하드 다이빙에서 유색인종으로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 1952년에 출전한 올림픽에서도 새미 리는 금메달을 받았다. 그는 의사이기도 하다.

미술 및 사진

도산 안창호는 사진 찍기를 좋아하던 선각자였다. 사진술이 미흡하던 시대 수많은 사진을 남겼다.

◈ 1914. 10. 22: 사진교수광고-사진 박는 법을 배우시기 원하시오?-여섯 달이면 영업 할 만치 또 나와 같이 남을 가르칠 만치 미술에 재미도 붓고 돈도 많이 벌게 가르치는데 교수비는 다만 50원/ 활동사진 만드는 법을 배우시기 원하시오?-내게로 오시오. 유명한 ‘포토풀레이’를 가르치고 교수비는 2백 50원, 활동사진기계 한 벌 2백50원, 사진사 배병헌, 통신번지는 신한민보사

◈ 1914. 11. 19: 본 항에 유하는 사진사 배병헌씨는 중국사람 5,6인으로 작은 단체를 성립하고 본 항 스탁톤 골목 942호 집에 사무소를 설치하고 활동사진술을 중국인에게 교수.

미국상항 화려 사진관-본인이 만든 본국 경처 포스트카드 판매

◈ 1918. 6. 20 (신한민보): (칼러 필름이 처음 시판될 때) 사진채색은 살빛과 같이도 할 수 있으며 사진 박을 때에 꽃을 찾던지 꽃밭에서 사진을 박았던지 꽃과 같이 색채를 낼 수도 있으며 값은 사진 한 개에 25전에서 원까지, 필름 채색은 한 개에 1원으로 10원까지 받으오니 동포는 시험하여 보시오.

◈ 1918. 7. 18: 사진기계 휴대법의 엄중-상항 세관은 사진기계 휴대를 절대 금지하여 위반하는 자는 간첩죄로 잡아 1만원 벌금 또는 2개년 금고에 처할 것이다.

◈ 1942. 10. 8: 재미 한족 연합회 집행부는 라성 한인 경위대의 괄병식과 상항 한인 맥아더일 행렬의 참가와 및 이번 8.29 현기식에 백인 모든 활동사진을 합하여 완전히 만들기 위하여 10월 4일 할리우드 활동사진 회사의 사진사를 청하여 교정을 더하였고 오래지 않어 완성이 되면 이를 가져 각 지방 동포에게 보일 예정이라더라.

◈ 1957년 12월 15일 워싱톤 D.C. 국립미술박물관에서 한국고대 미술전시회를 개최하여 대인기를 일으켜 첫날 관람객이 일만 인이라. 이 전시회는 한미 양국인사들 사이에 여러 달 동안을 두고 준비하여 미국인 선택위원들이 한국에 가서 감정하여 고대미술품 금관, 불상, 조각, 도자기 등 187점을 가져왔다. 8개 도시 미술박물관에서 18개월 동안 수백만 미국시민들에게 한국 고대 문화와 민족 예술의 극치를 실컷 자랑하고 1959년 7월 17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안익태의 ‘쾌소식’을 전한 《조선일보》 1934년 2월 15일자 지면. 사진은 뉴욕서 열린 안의 첼로 연주회 포스터와 연주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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