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에 여성의 이민의 형태는 농장의 노동자로 가는 남편을 따라서 가거나 사진결혼이 주를 이뤘다. 그 외에 여자가 미국에 온 경우는 유학생 또는 전도사였는데 그 수는 그리 많지가 않았다.
1903년 하와이에 도착한 첫 이민 93명 가운데 여자는 22명으로 가족을 따라간 사람들이었다.
이민을 가기 전 이민을 신청한 사람들이 수속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이민회사에서는 남자들에게는 상투 자르기를 권하고 양복도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여자들에게는 머리를 자르라고 권하지도 않고 서양 옷도 지급해 주지도 않았다. 그들은 치마저고리에 쪽을 진 채로 하와이에 와서 4~5년이 지날 때까지도 한복차림을 고수한 사람도 많았다. 그들이 그렇게 오래 한복을 입고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 농장 일보다는 취사나 세탁 등 집안에서 가사 일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1903년 1월 13일부터 1905년 6월 30일까지 하와이에 온 한인 이민 총 수는 7천 226명으로 그 중에 여자는 637명이었고 아이들은 541명이었다. 그 뒤 1910년 3월부터 1924년 5월 15일 ‘동양인 절대배척법안’이 통과되기 전까지 이민 숫자는 하와이에 951명, 미국 본토로 115명이 들어와 총 1066명이 온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05년 이후로 이민 숫자가 급격히 줄어든 것은, 일본정부가 한인들의 미국 이민을 억제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한국정부에 1905년에 하와이 이민을 중단시키라고 한 이유는 하와이에 있는 일본 노동자들이 한인으로 인해 직장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여 일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이유는 일본이 아시아를 점령하기 위하여 군사적으로도 이용하고 경제적으로도 이익을 취하고자 함이었다. 점령에 필요한 길을 닦고 한국의 쌀을 생산하여 일본으로 들여가기 위해서는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하기에 한인이 하와이로 이주하는 것을 막았다.
1910년 대한인국민회가 미국 본토 내 한인인구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남자가 1999명, 여자가 22명이었다.
시대별로 본 한인 이민 여성의 특징
1903년-1910년 : 주로 남편을 따라 오거나 유학생들이었다. 특히 공부를 위해 온 여성들은 유학을 올 수 있는 형편의 여자들로 주로 고등교육을 받은 도시에 살던 부유층이었다. 당시 8천여 명의 미주 한인 인구 중 여성은 10%를 넘지 않았다.
1910년-1924년 : 이민이 금지됐던 이 시기에 미국에 온 여성들은 가난을 피해 또는 공부를 하기 위해 신세계를 동경하며 온 용감한 사진결혼 여성이 주를 이루었다. 그 중에 미국에 와서 신식교육을 받고자 했던 사람들은 젊었고 고등교육도 받았으며 미국에 와서도 독립운동 등 정치적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농장에서 일하거나 혼자 사는 사람들의 식사와 빨래를 담당하며 맞벌이를 했다.
1950년-1964년 : GI Marriage라고 하여 미군과 결혼하여 온 한국여성들로 그들을 Korean War Bride(한국전쟁 신부)라고 불렀다.
전쟁으로 인해 아버지나 오빠 등 가족의 기둥을 잃은 여성들은 전쟁의 희생자가 되어 가족을 부양해야만 했다. 갑자기 밀려들어온 서구화 문명 속에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한 군인들과 결혼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높은 이혼율을 보였다. 비록 자신들은 희생했지만 조국에 생활비를 보내고 온 가족을 미국으로 이주시켜 그들이 터전을 잡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60년대 후반: 고등교육을 받은 직업여성이 주를 이뤘고 1970년대 중반이후에는 다양한 경제적 배경을 지닌 도시여성들이 이민을 왔다.
1903년부터 1905년까지 한국이민자 수의 불과 10%만이 여자였던 초기 하와이 이민의 다수는 당연히 가정 없는 홀아비들이었다. 고된 노동 뒤에 밤이 되어 막사에 돌아가도 편히 쉴 가정이 없고 별다른 취미가 없던 꽤 많은 수의 초기 이민들은 아편과 술과 노름으로 외로움을 달랬다. 그로 인해 노동자 캠프에는 싸움이 그치지 않자 이것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노동의 능률은 떨어졌고 집단이민이 묶인 1905년 이후에는 새로 이민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1907년에는 개정법이 발효되어 하와이에서 본토로 가는 발조차 묶이게 되자 수천 명의 노총각들은 희망조차 사라져 자포자기를 하였다. 그러자 그들에게 안정된 생활을 하게 만드는 것이 농장에 도움이 되는 최선의 방법이라 여긴 당국에서는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혼인을 장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진혼인’이라는 새로운 혼인법이 만들어졌다.
정부당국은 사진혼인으로 들어온 여자들에게는 입국을 허락하고 영주권을 내주었다. 사진혼인법은 미주에 이민한 동양 사람들에게 적용되기 시작했다. 미국과 하와이에 있는 남자가 본국에 있는 처녀에게 사진을 보내고 그 사진을 본 여자가 결혼을 원하면 미국으로 데리고 와서 결혼하는 형태였다.
사진 혼인의 효시는 1908년 샌프란시스코 일본영사관에서 캘리포니아에 사는 일본 남자들이 일본에 사는 여성들과 사진을 통해 결혼을 할 수 있도록 정부 당국에 요구함으로 시작됐다. 사진혼인은 독신총각들이 사전에 사진과 양력 그리고 생업을 기록하여 처녀에게 보내면 마음이 내킨 처녀는 자신의 호적등본과 사진으로 응답하였다. 총각 쪽에서는 사진 속의 얼굴만을 보고 결혼할 의사가 있으면 여비와 함께 동의서를 보냈다. 이런 방식이 그대로 한인들에게도 적용된 것이다.
한국에서 신부를 데려오는 경우 드는 비용은, 배 요금과 일본경유에 드는 숙박비, 보건비, 입국수속비 등을 합해 모두 70달러가 들었다. 그러나 당시 풍속은, 신랑 될 사람이 200달러정도를 신부 될 사람에게 보내는 것이 통례였다.
첫 번째로 사진 혼인을 한 사람은 1910년 12월 2일 호놀룰루에 도착한 호남출신 최사라(23세)로 당시 하와이 국민회총회장을 맡고 있던 38세의 노총각 이내수와 결혼한 것이다. 주례는 민찬호 목사가 했다. 초기 사진신부로 미국에 오는 한인여성들은 영남출신들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경상도 해안지구와 경유지인 일본의 요꼬스카 항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서울출신 여성들은 제물포에서, 함경도 및 평안도 지방에서는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들어왔다.
사진 신부들은 대개 머리가 명석하고 비교적 교육수준이 높고 열성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비해 사진 신부를 찾는 초기 이민 남성들은 나이가 많고, 학력이 낮은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사진혼인에 따른 문제점도 많았는데 그 이유는 남자들이 사진신부를 찾으면서 자신의 나이와 학력을 속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진혼인으로 미국에 온 여성 중에는 미국에 가서 결혼도 하고, 공부도 하겠다는 목적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막상 와서 보니, 남편의 실제 나이는 많고 교육수준도 낮아 실망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일부 여성들은 그런 현실을 못 이겨 이혼을 하기도 했다.
이승만 박사가 1913년 1월 처음 하와이에 왔을 때 사진결혼으로 미국으로 왔다가 집을 나와서 노동자 숙소에서 따로 살고 있는 다수의 여성을 보고, ‘스잔나 웨슬리홈’에 기숙시켰다는 것을 보면 그 심각성을 엿볼 수 있다.
1915년 3월 25일자 신한민보에는 ‘사진결혼의 이해’라는 논설에서 “남자들은 혼인할 때 …… 자기보다 승한 여자와 혼인하면 평생을 치마 밑에서 욕을 면치 못 한다”고 하여 그 당시 자신을 속이고 과분한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우려했다.
그런 중에도 많은 여성들은 자신이 처한 불운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남편을 단순 노동에서 기술 직업으로 바꾸도록 격려하는 등 진취적인 생활 태도로 가정을 이끌어 나갔다. 또한 더 좋은 조건을 찾아 함께 본토 샌프란시스코 등 여러 도시로 이주하여 개인 사업을 시작하는 등 본토에서도 이민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초기 이민여성의 생활상
하와이 한국인 생활을 목격하고 통역으로 일했던 현순이 쓴 ‘하와이 유람기’에는 당시의 집 구조를 설명한 부분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주거 가옥은 목제 가옥으로 복도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10여 개의 방이 있었다. 한방에 5-6명이 동거하게 하고 처자가 있는 사람에게는 방 하나를 주었다 한다. 남편을 따라온 부인들은 임신을 하고 출산이 잦아 건강이 많이 저하됐다. 일부 여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20명, 30명의 홀아비 노동자들의 밥과 세탁을 위해 새벽 3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하는 고된 생활을 했다. 1903년 하와이 파하라 농장에 예를 들면 남자가 42명에 여자는 단 둘이었다. 42명의 밥을 짓고 옷을 빨고 다리는 등 여자들은 한국에서와 다름없는 일을 하였다.
초기 이민여성에게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사진혼인으로 상대방을 잘 알지 못한데서 오는 불화, 백인 남자들에게 받는 갖가지 모욕과 폭력에 대한 공포였다. 한인 농장 이민들에게는 세 가지의 규칙이 있었는데 ‘동포애의 강화’ ‘여성의 존중과 보호’ ‘캠프에서 부도덕한 여자를 허용치 말 것’이었다. 세 가지 규칙 중 여자에 관한 규칙이 둘이나 있었던 것은 혼인하여 온 사람이 많지 않았던 당시, 여자로 인한 문제가 많았음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쌀농사를 짓던 초기 이민들은 백인들의 난폭한 협박 때문에 밤에는 일체 외출을 삼가고 여자들의 경우는 당연히 더욱 조심했을 것이다.
재미 여성의 교육과 독립정신
가족을 동반한 초기 이민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자녀교육이었다. 학교교육과 더불어 더욱 중요한 것은 자녀들에게 조국애 정신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자녀교육의 일차적 책임은 어머니에게 있었다. 1916년 2월22일자 신한민보는 ‘재미 한인의 여자 교육방침’이라는 사설에서 어머니에게 첫째 단체의 공고, 둘째 민족의 번식, 셋째 자녀에 대한 자국정신 함양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런가 하면 이민초기 가난하고 고된 삶 속에서도 국내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 등에 여성들은 여러 번에 걸쳐 의연금 보냈다. 1919년 여성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의연금을 모집할 때는 아기를 업고 다녔다. 뜨거운 땡볕아래 아이를 등에 업고 걸리며 멀리 떨어져있는 각 농장을 방문하며 모금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살던 초기 여성들은 Ellen Stark Ford Home에서 미세스 레익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영어 및 재봉 등의 교육을 받았다. 조국과는 다른 환경에서 스스로의 지위 향상에 애썼다. 배운 재봉기술로는 자신의 옷과 아이들의 옷을 직접 만들어 입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