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일곱 개의 언덕 위에 세워진 시간의 무대


샌프란시스코를 처음 찾은 여행자는 숨을 몰아쉬며 묻습니다.
“왜 이 도시는 이렇게 오르막이 많죠?”

이 도시는 평지 위에 세워진 효율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굴곡을 남겨둔 거대한 무대처럼 보이죠. 앞서 우리는 경험 없는 설계자들이 이 험준한 지형을 무시하고 격자무늬 지도를 덮어버린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무모한 설계와 거친 지형이 충돌하며 만들어낸 결과물이 바로 샌프란시스코의 독특한 개성, ‘일곱 개의 언덕(Seven Hills)’입니다.

로마가 일곱 언덕 위에서 제국의 운명을 결정했듯, 샌프란시스코의 성격 또한 이 언덕들 위에서 빚어졌습니다.


1. 항구를 바라보던 도시의 눈 — Telegraph Hill

도시의 시작은 언제나 바다였습니다. 19세기 중반, 몽고메리 스트리트가 아직 해안선이었던 시절, 텔레그래프 힐 정상에는 거대한 망루가 있었습니다. 금을 찾아 몰려든 배들이 만(Bay)으로 들어올 때마다 신호기가 움직였죠. 배가 무엇을 실었는지, 얼마나 많은 ‘포티나이너스(광부)’가 도착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곧 돈이자 기회였습니다.

오늘날 그 자리에는 코이트 타워가 서 있습니다.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는 평화로운 모습 뒤로, 잠시 눈을 감으면 바다 밑 매립지에 묻힌 수백 척의 목선과 그 배들을 바라보며 일확천금을 꿈꾸던 이들의 열망이 안개 사이로 비치는 듯합니다.

2. 부와 야망이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 곳 — Nob Hill

텔레그래프 힐이 ‘관찰’의 장소였다면, 노브 힐은 ‘욕망’의 상징이었습니다. 1873년 케이블카가 발명되기 전까지 이 가파른 언덕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고립된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술의 혁신은 철도 재벌과 은광 왕들을 언덕 꼭대기로 실어 날랐습니다. 그들은 경쟁하듯 화려한 저택을 세우며 “이 도시의 주인은 우리다”라고 선언했습니다.

1906년 대지진은 그 오만한 저택들을 모두 무너뜨렸지만, 언덕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무너진 자리에는 그레이스 대성당과 고급 호텔들이 다시 들어섰습니다. 놉 힐의 경사는 단순한 지형이 아니라, 몰락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재건의 의지를 상징합니다.

3. 구불구불한 삶의 지혜 — Russian Hill

격자무늬 설계가 가장 가파른 경사와 만났을 때, 사람들은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했습니다. 러시안 힐의 롬바드 스트리트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이곳을 ‘세상에서 가장 구불구불한 길’이라 부르며 즐거워하지만, 사실 이는 너무 가파른 경사를 안전하게 내려오기 위한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타협이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는 늘 이상(격자무늬)과 현실(언덕)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던 도시였습니다. 러시안 힐은 높이 오르는 열망만큼이나, 안전하게 내려오는 길도 중요하다는 삶의 지혜를 가르쳐줍니다.

4. 사라졌다 부활한 스카이라인의 축 — Rincon Hill

과거 부유층의 주거지였다가 산업화와 항구 개발로 인해 한동안 잊혀졌던 린콘 힐. 하지만 오늘날 이곳은 세련된 고층 콘도들이 늘어선 도시의 새로운 심장부로 부활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역사는 직선이 아닙니다. 매립지에 배를 묻고 그 위에 빌딩을 올렸듯, 린콘 힐은 도시가 스스로를 어떻게 끊임없이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지를 보여주는 산증인입니다.

5. 도시의 선택을 내려다보는 자리 — Twin Peaks

1918년 터널이 뚫리면서 서쪽 확장의 기폭제가 되었던 트윈 픽스. 이곳에 서면 비로소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베이 브릿지, 금문교, 그리고 그 사이사이를 메운 수많은 언덕들.

트윈 픽스에서 내려다보는 샌프란시스코는 한 가지를 분명히 말해줍니다. 이 도시는 편리한 ‘평탄함’ 대신 고유한 ‘굴곡’을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선택이 있었기에 샌프란시스코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풍경을 갖게 되었습니다.

6. 사색과 안개를 품은 숲 — Mount Sutro

금융과 기술의 화려함 뒤편, 유칼립투스 숲과 짙은 안개가 감싸는 마운트 서트로가 있습니다. 이곳에 오르면 도시의 소음은 사라지고 안개 섞인 숲의 향기만이 남습니다. 샌프란시스코가 단지 돈과 건물로만 이루어진 도시가 아니라, 예술과 사유, 그리고 자연이 공존하는 공간임을 이 언덕은 묵묵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7. 다양성을 품은 가장 높은 성지 — Mount Davidson

도시에서 가장 높은 자연 언덕인 마운트 데이비드슨 정상에는 커다란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이곳은 종교적 의미를 넘어, 전 세계에서 건너온 수많은 이민자가 각자의 신앙과 문화를 가지고 이 도시에서 자리를 잡았음을 상징합니다. 치나타운과 피셔맨스 워프를 일군 이들이 그랬듯, 새로운 도착자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이 높은 언덕 위에 남겼습니다.


에필로그: 왜 우리는 다시 언덕을 오르는가?

사실 샌프란시스코에는 수십 개의 언덕이 더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굳이 이들을 ‘일곱 개의 언덕’이라 부르는 이유는 일곱이 가진 ‘완성’의 상징성 때문일 것입니다.

샌프란시스코를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르고, 내려오고, 다시 오르는 일의 반복입니다. 지주들의 살해 협박을 견디며 길을 냈던 오파렐의 고집처럼, 대지진의 잿더미 위에서 다시 벽돌을 쌓았던 이름 없는 시민들의 손길처럼, 이 도시의 경사는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을 줍니다.

평탄함 속에는 안주가 있지만, 경사 속에서는 도시도 사람도 단단해진다는 것.

오늘도 안개를 뚫고 케이블카가 언덕을 오릅니다. 과거의 굴곡진 역사가 미래의 찬란한 풍경과 만나는 곳. 샌프란시스코의 진짜 매력은 바로 그 가파른 언덕길 위에 있습니다.

과거에 미래를 더하다. 샌프란시스코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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