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지역 초기 이민 또는 유학생들은 일제의 지배로 기울어 가는 조국의 운명을 안타깝게 지켜보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조국을 바로 세우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그러나 결국 경술년에 치욕스러운 한일합방이 일어났다. 이후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은 탄압을 받게 되고 언론과 행동이 자유로웠던 해외에서 활발히 독립운동이 전개됐다.
특히 미주지역은 조국과 엄청난 거리가 있는 곳이었지만, 사실상 해외 독립운동의 대부분을 뒷받침하고 앞장섰던 곳이다.
이들의 노력과 희생이 밑거름이 되어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쁨이 우리 민족에게 찾아왔다. 해외 각처에는 오매불망 조국을 잊지 못하고 그 장래를 염려하며 눈물과 땀을 흘렸던 애국선열들의 흔적이 여러 군데 남아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때의 흔적과 역사적 장소는 우리에게 점점 잊혀간다.
그것은 아마 후대로 이어지는 이민들의 삶 자체가 피곤하고, 이 사회에 뿌리 내리는데 전심전력한 나머지 이민역사를 챙겨둘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는 바로 유적지 곁에 사는 사람들조차 그 내용을 거의 모르고 있는 상황이 됐다.
이제 이민 1백년을 넘어선 이때, 한번쯤은 초기 이민들의 유적을 되돌아보고 사정이 허락한다면, 그 중에 가능한곳은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간직하고 물려주는 방안을 모색하면 좋을 것이다.
역사는 구체적인 장소가 제시될 때, 그 실감과 의미를 더하며 훗날로의 계승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미주지역 유적지 중에 북가주 샌프란시스코지역, 중가주, 남가주의 주요 유적지를 알아본다.
북가주 샌프란시스코 지역
1903년부터 하와이에 왔던 초기 이민들은 더 나은 노동조건을 찾아 그 다음해인 1904년부터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하와이 또는 해외에서 오더라도 미국 본토로 들어가려면 샌프란시스코는 꼭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샌프란시스코는 일 년 중 대부분의 날이 맑고 선선해 마치 조국의 가을 날씨를 연상시키는 곳이었다. 여기에 노동자들의 대우도 하와이보다 뛰어나고 직업의 선택도 다양하여 자연스레 한인들은 이곳으로 모여들게 됐다. 따라서 이곳은 한인들끼리의 모임, 기관, 단체 등도 제일 먼저 형성되고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운동의 최고 중심지가 됐다.
샌프란시스코는 미주 한인들의 첫 친목회가 생긴 곳이고 처음으로 교회가 생긴 곳이다. 처음으로 여자부인회가 생겼으며 미주 한인의 대표기관인 북미대한인국민회의 총회관이 1938년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장인환 의사의 의거도 이곳에서 일어났으며 이는 곧 국내외 항일운동의 기폭제 역할이 됐다.
이런 의미로 샌프란시스코가 해외 우리 민족 유적지 1호 도시로 꼽히는 것은 당연하다.
천사 섬(Angel Island):P.O. Box318, Tiburon, San Francisco, CA 94920


현재는 Angel Island State Park으로 캘리포니아 주 공원이 되어있다.
하와이를 거쳐 미국에 입국하는 한인 이민과 유학생들이 질병검사를 비롯해 실질적인 입국검사를 하는 이민국이 있던 곳이다. 오랜 뱃길 여행으로 병이 나거나 전염병이 있으면 미국 입국이 거절됐다.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천사섬 안에 있는 수용소에서 장기간 체류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이역만리 먼 길을 배를 타고 와서 신체검사에 걸려 돌아가야 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몇 달을 걸쳐 항해, 겨우 뭍에 닿았는데 곧바로 되돌려 보내지는 이의 심정으로 보면 이 섬은 천사의 섬이 아니라 악마의 섬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천사 섬은 원래 1850년대부터 미국의 군사 요충지였다. 군사 기지들이 구축되어 있었던 흔적이 지금도 적지 않다. 1905년 이민국 건물이 천사섬 안에 건설되기 시작하여 1910년부터 본격적인 이민국 업무 활동을 보다가 1940년에 폐지됐다.
공립협회 회관 자리-938 Pacific Ave. San Francisco.
세계 만국과 나란히 서서(공립) 동족 간에는 상부상조하고 애국하며 항일운동을 할 목적으로 1905년 11월4일 선 공립협회가 있던 곳이다. 미주 본토에 처음으로 회관을 갖춘 것인데 실질적인 미주 한인사회 대표기관 역할을 했다. 여기서 공립신보 신문도 발간했다.
안창호, 송석준, 정재관 등이 활동하던 이곳은 현재는 개인 주택이 들어서 있다.

페어몬트 호텔:950 Mason St. San Francisco, CA 94108
1908년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가 장인환에게 저격당하기 전에 머물렀던 호텔이다. 그는 조선을 위해 일하여야 할 조선의 외교고문이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크로니클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 후 한국에 유익한 일이 많아 양국관계가 점차 친밀해지고 있으며 한인들은 일본을 환영한다.”는 망언을 했다.
이 기사를 본 한인들은 격분했다. 한인들은 상항 한국인연합감리교회에서 모임을 갖고 대표를 뽑아 스티븐스를 만나 항의하고 그의 친일 행각을 규탄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스티븐스가 머무는 페어몬트 호텔로 공립협회 회원 2명과 대동보국회 회원 2명으로 구성된 한인대표 4명이 찾아가게 된다.
스티븐슨은 동양인들이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전갈을 받고 일본인들이 온 줄 알고 로비로 내려왔다. 한인 대표들은 그의 발언 내용을 비판하고 항의했다. “한국에 무슨 일이 유익한가, 어떤 한인들이 일본을 환영한단 말인가, 당신은 왜 한국을 위해 일하지 않고 일본을 위해 일하는가” 등등. 그러나 스티븐슨은 자신의 발언에 잘못된 것이 없다는 버텼다.
여기에 화가 난 한인 일행 중 한 명이 로비에 놓인 의자를 들어 스티븐스에게 내려치자 나머지 세 사람도 손으로 그를 쳐서 그의 얼굴에 피가 나고 부상을 입게 됐다. 호텔 종업원이 싸움을 말리고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리자, 한인대표들은 그 이유를 큰소리로 설명했다. 이 일로 출동한 경찰관들도 한인대표들의 의분을 이해해 연행 등을 삼가고 귀가를 종용했다.
한국에서 대통령이 오면 머무는 이곳엔 지금도 페어몬트 호텔이 그 자리에 서있다


팔레스호텔-2 New Montgomery St. San Francisco, CA.94105
현재 쉐라톤 팔레스호텔 자리로 1883년에 최초로 미국에 파견된 사절단 일행이 머물렀던 곳이다. 1888년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 일행도 도착하여 6층 840호에 묵었는데 귀국 길에는 6층 433호에 묵었다. 1906년 대지진과 화재로 불에 탄 것을 1909년 신축하였다.
1875년 문을 연 팔레스호텔은 개장 당시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7층짜리 호텔로 샌프란시스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이었다. 한인 일행이 왔을 당시 그 호텔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는데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박정양 일행은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자 지진이 일어난 줄 알고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는 일화가 있다.


페리빌딩
장인환의사와 전명운의사가 스티븐스를 그 앞에서 저격했던 페리빌딩은 당시 모습 그대로, Embarcadero St. 그 자리에 있다. 앞으로는 상업지구로 지정되어 장차 대규모 쇼핑센터로 변모할 예정이다. 호텔 로비에서 한인들에게 맞은 스티븐스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일정을 예정보다 서둘렀다. 워싱턴 D.C.로 가려면 페리 빌딩에서 배를 타고 오클랜드로 건너가 오클랜드 역에서 동부 행 기차를 타야했다. 그러나 그의 일정을 알아챈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페리빌딩에서 그를 기다렸다.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 10분 세 발의 총성이 울렸고 총에 맞은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틀 후인 25일 사망했다.


사이프러스 공동묘지-1370 El Camino Real Colma, CA 94104
현재 Cypress Lawn Cemetery & Memorial Park 이라고 불리는 이 공원묘지엔 많은 한인들의 묘가 있다. 장인환의 유해도 한국으로 이장되기 전 이곳에 묻혀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지역 초기 이민들이 사망하면 주로 이곳에 안장되었다. 고 이대위, 양주은 옹의 묘가 남아있었으나 이대위는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지금도 이민 후손들이 영면하는 곳으로 많은 한인들이 묻혀있다.

상항 한인연합감리교회-1123 Powell St. San Francisco
1903년 9월23일 안창호 이대위 등 망명인, 유학생, 인삼상인 10명이 ‘신민회’를 조직하고 첫 예배를 드렸다. 후에 정식으로 감리교회가 된 이 교회는 미주 본토에 생긴 첫 교회로 대지진 후 동포 구호사업과 계몽사업, 독립운동의 근원지였다.

이 교회에서 발간한 잡지 ‘대도(大道)’는 미주에서 한글로 발행된 첫 발간물로 미주와 본국에 있는 교우와 동포들에게 전도와 교양을 기르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1930년 6월1일 1123 Powell St.에 교단 선교부의 보조금과 헌금으로 교회건축이 완공됐다. 처음으로 자체 건물을 갖고 200여명의 교포들과 교인들이 모여 헌당식을 가졌다. 대한인국민회 활동을 후원한 이 교회는 미주지역의 초기 한인 인사들 중 안 거쳐 간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한인사회와 교계의 중심지였다.
1994년 교회가 이전을 할 때, 한인사회 일각에서는 교회 건물을 유적지로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어 시 사적보존위원회 공청회까지 열리는 등, 교회 측과 보존협회 측의 뜨거운 논쟁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선교사명을 우선과제로 하여 건물을 매각하고 현재의 샌프란시스코 선셋 지역으로 이전했다.
현재는 이 자리는 ‘광명도현옥제궁전’이라는 중국인의 절로 사용되고 있다. 3030 Judah St. San Francisco, CA 94122로 이전한 상항 한인연합감리교회는 2003년 이민 1백주년과 더불어 창립 1백 주년을 맞았다.
흥사단 창립 자리 1914 Lyon St. San Francisco
흥사단은 도산 안창호가 민족의 자주독립과 인물양성을 위해 ‘우리민족 전도대업의 기초’를 위해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 시스코에서 창립한 단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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