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한미조약이 체결된 후 한국정부의 친선대사 민영익 일행은 1883년 9월 2일 사절단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하여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땅에 발을 디딘 사람들이 됐다. 민영익 일행은 영어를 아는 사람이 없어 일본인 통역사를 두고 일행 중 유길준이 우리말을 일본말로 하면 일본인이 영어로 통역했다. 미국인 통역을 하던 사람은 하버드 대학을 나온 로웰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유길준을 자기와 친교가 있던 모스교수에게 소개를 해 주었다.
덕분에 유길준은 매사추세츠에 셀렘 시에 머물면서 모스교수에게 4개월간 지도를 받으며 Dammer Academy에서 공부하였다. 미국에 남아서 관비로 공부를 한인 최초의 유학생이었던 그는 학업을 마친 후 유럽을 돌아본 후 귀국하였다. 그가 귀국하여 쓴 책 ‘서유견문’(서양을 방문하여 보고들은 것)은 개화기의 한국 지식층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서재필, 서광범, 박영효는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역적으로 몰리자 1885년 정치 망명객이 되어 샌프란시스코에 오게 된다. 주미 초대공사였던 박정양이 1887년 10월13일 부임하고 1888년에는 윤치호가 첫 정식 유학생 자격으로 도미하여 에모리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1891년 미국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절단으로 왔던 변수라는 사람으로 메릴랜드 농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러나 변수는 그해 열차사고로 사망하여 워싱턴에 묻혀있다.
1892년 서재필은 한인 최초로 콜롬비안 대학(조지 워싱턴대학의 전신)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895년에는 첫 한인 여성 유학생으로는 에스더(김)박이 존스 합킨스 의과대학에 입학, 5년에 걸쳐 수업하고 1900년에 귀국하여 개업의가 되었다. 서병규도 메릴랜드 농업 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김규식 박사의 경우는 고아가 된 4살부터 선교사 언더우드의 보살핌 속에 교육을 받고 1897년경에는 미국으로 유학, 1903년 로노크 대학을 졸업했다.
1902년에는 안창호가 유학생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왔으나 학업을 포기하고 한인사회 건설의 개척자로 활동을 했다. 이승만은 1904년에 도미하여 한인으로 처음 하버드 대학 출신이 되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한인 최초의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용만은 1904년에 도미하여 1906년 헤이스팅 대학에서 군사학을 공부하며 1909년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였다. 1910년에는 네브라스카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는데 조국을 독립시키기 위해서는 군사적 행동이 불가피하다고 확신했던 인물이다.
그는 하와이 기관지의 하나인 신민국보 주필이면서 1919년에는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군단’을 설립하여 군사적 정신고취에 힘을 쏟았다.
당시 대부분의 초기 이민들은 노동으로 생계유지에만 급급하던 때였으나 초기에 이민 온 윤병구, 안창호, 정한경, 박용만, 이승만등의 지도자들의 도움으로 생활과 사고가 크게 변하였다. 특히 안창호는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에 왔으나 미개한 한인들의 생활 상태와 어려움을 보고 자신의 학문은 포기하고 한인들의 생활 문명화, 복지향상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한인들을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정원에서 변소에 이르기까지 손수 청소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미국에 살려면 배워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해 문명인으로 해야 할 바를 가르치고 강연과 훈화로 계몽하고 교도했다.
1890년부터 1905년까지 미국에 온 한인 유학생의 수는 64명이었다. 1910년 한일 합방 후부터 1918년까지 미국으로 유학 온 사람은 여행권 없이 도미하였는데 그들을 ‘신도학생’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신도학생회를 조직하기도 했는데 신도학생은 모두 541명으로 집계됐다. 이중에서 미국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20%정도였다.
이들은 학업과는 별도로 재미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조국의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1913년에는 콜롬비아 대학 한인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미전역에 있는 200여명의 학생들과 연결, 한국 책을 수집하였다. 또 강의 내용이나 전시할 한국 고유문화를 수집하여 도서관 성격의 ‘The Korean Culture Society’를 설립했다.
1915년부터 1916년까지 미국에 온 한인 유학생 수는 약 1백 명이었고 1921년부터 1940년까지는 189명 정도였다. 이들은 일본총독부 여권을 가지고 왔으며 기독교 계통의 후원으로 미국 유학이 이뤄졌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바로 소환이 되므로 취학 성적이 좋았다.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15%였고 대학졸업생이 65%였다. 이들의 대부분은 학업이 끝나면 귀국하여 교육계나 종교계에서 활약하였다. 1929년 미주 한인 유학생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주 유학생 수는 미 본토에 313명(캐나다 45명 포함), 하와이 155명 등 472명이었다. 우리가 지금까지도 잘 알고 있는 백낙준, 김활란, 고황경, 장면, 한경직, 김재준, 송찬근 등이 당시의 유학생이었다.
1919년을 전후해 하와이를 포함한 미주 한인들의 전체 숫자는 약 7천 명으로 알려졌는데 해방이 되던 1945년까지 1만 명이 넘지 않아 그 증가폭은 매우 미미했다.
유학생 단체와 그 활동
최초의 한인 유학생 단체는 1913년 네브라스카 주 헤이스팅 지방에서 박용만이 주동이 되어 만든 ‘동양한인 유학생회’로 초대회장에는 박처우였다. 샌프란시스코에는 1916년 10월 27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한인학생 친목회’가 조직됐다. 1918년 8월 18일에는 중가주 다뉴바 지역에서도 학생단체가 조직됐다.
계속하여 여러 단체가 많이 생겨났는데, 이 단체들은 서로 미주 전체 한인들을 대표하는 것처럼 자처해 말썽이 일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샌프란시스코 한인학생 친목회는 각 지방 학생회에 연락을 보내 1919년 9월 26일 연합회의를 갖게되었다. 이 자리에 참석자들은 한국학생 전체를 대표하는 하나의 단체를 만들자는 데 뜻을 같이하여 1920년 4월 6일에 총회 결성을 위한 발기자 회의를 조직하게 되었다. 북가주 샌프란시스코의 발기자는 김현구, 김용중, 김려식, 명일선, 문도로씨 등이 대표였으며 윌로우스 지방에서는 최능익, 최윤호, 조종익, 최능진 등이 대표였다.
드디어 1921년 4월 30일에는 ‘미주한인유학생총회’가 결성되었는데 본부는 뉴욕으로 하고 회장에 이용직, 부회장에 조병옥이 선출됐다. 1927년 3월 9일 명칭을 ‘북미 대한인 유학생회(The Korean Student Federation of North America)’로 변경하였는데 255명 유학생이 거의 모두 회원으로 참가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당시 유학생은 대학원생 60명, 대학교 125명, 예비대학 35명, 특별과 36명이었다. 1925년 3월 1일에는 국한문으로 된 한인 학생잡지 ‘라키(Rocky)’를 창간하였으나 재정난으로 1936년 제7호까지 발간하고 중단됐다.
북미 대한인 유학생회는 1945년까지 24년간 유지되었으나 해방과 더불어 많은 학생들이 귀국하고 그 뒤 유학생들과의 연계가 없어지면서 1948년에는 해체되고 만다.
1914년 신한민보에 ‘재미 한인 유학생’이라는 논설에는 “첫째, 조국의 학문에 힘쓰라” “둘째, 만가지 사업이 반드시 단순한 주의를 요구하니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일에 목표를 두라” “셋째, 공덕심을 가지라”라고 유학생을 독려했다.
1924년 6월에 시카고에서 열린
제 2회 ‘미주한인유학생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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