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한인의 교육사업
초기 한인의 교육 사업은 미국물정을 모르고 온 성인들을 가르치는 일과 2세들에게 우리의 말과 글, 문화를 교육하는 일이었다.
하와이에 초기 이민 온 한인들은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저녁과 토요일에는 한국어학교에 가서 한글을 익혔다.
특히 초기 이민 1세들을 무지에서 깨우는 계몽운동이 필요했다. 이런 의미에서 초기 이민과 더불어 신문발행이 시작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신한민보는 한인사회의 소식을 전해주고 미주에 흩어져 있는 한인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지식인, 지도자들의 기고문, 사설 등을 통해 한인사회 선도 역할을 담당했다.
신한민보에 자녀교육에 관한 글에는 “자녀를 교육함은, 자유 독립을 귀중히 여기며 고상한 덕성을 함양하며, 강장한 신체를 연단하되 형질에 흐르지 말고 정신상 교육을 베풀어서 권리와 의무에 대한 관념을 계발하여 자중자귀를 알게 하며, 한 가지 이상 기예를 가르쳐서 다른 사람을 의뢰하지 않게 하며 자치의 힘을 배양하여 …… (중략) 독립의 정신으로 세상을 익히고 자립하는 민족이 되게 함이라. …… (중략) 조국강토를 귀히 여기고, 우리 민족의 가장 비참한 정형을 생각하여 잊지 않게 하며, 자기가 이러한 국가와 민족에 대하여 어떠한 의무가 있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교육에 큰 뜻을 둔 지도자들은 본국에서 신문과 잡지를 들여다 독서를 장려하며, 여러 곳에 강습소를 설치하여 국어와 영어를 가르쳤다.
1903년에서 1905년 사이에 약 4백 명의 한인 어린이가 부모를 따라 하와이에 들어왔다.
1906년 9월2일 하와이 감리교회는 호놀룰루에 최초의 한인학교 ‘한인 기숙학교’를 세웠다. 그 뒤에도 많은 학교가 추가로 설립된다.
1905년부터 1925년 사이에는 미주 전역에 한인들이 사는 각 지방의 예배당, 교회마다 국어학교가 설립됐다.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국어학교의 경우는 매일 수업이 있었다. 이민들은 낮에 고된 노동으로 지친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문을 깨우치는데 열심을 다했다. 2세들을 위한 한글 교육은 토요일, 방학 때를 이용했다.
대한인국민회는 국어학교에 매월 보조금을 주어 교육의 활성화를 기하였다. 국어학교와 관련, 모스코바에 있던 이범진이라는 외교관은 1백 불을 기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각별히 국어교육에 관심과 애정을 가졌음이 분명한 그 외교관은 1910년 한일합방소식에 1911년 자결하고 말았다고 한다. 사후 그의 재산은 약 3천 달러로 그의 유서에 의해 미주에 독립운동 지원을 위해 대한인국민회로 보내졌다. 이 같은 각성 있는 지도자들의 노력과 헌신, 희생으로 60퍼센트가 넘던 문맹률이 점차 떨어져 1915년 이후에는 재미한인으로 국문신문을 읽지 못하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926년 이대위 목사(왼쪽)와 샌프란시스코 한글학교
1933년 동양인 총수에 대한 취학자의 비율을 조사한 통계에서 한인의 취학률은 31%로 나타났는데, 이는 동양인 중에서 가장 높은 수치였다. 그러나 1942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폭격을 기점으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이 참전하면서 동양인들의 각국의 모국어 교육이 법으로 정지되고 만다. 한국어학교는 1944년부터 다시 시작됐다.
샌프란시스코
1906년 1월에 문경호 목사가 있던 한인 미션에서 남자 교사와 여자 교사가 야학을 열었다. 1913년 상항 지방회 학무원 강영소가 보고한 바에 의하면, 베이지역의 한인 남녀학생은 30명이었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각 15명씩 동 수였다.
당시 써니베일의 에멀슨, 해밀턴 초급학교와 마운틴 뷰의 노웰 중학교 등에 한인 학생들이 재학한 기록이 있다. 1916년 10월 27일에는 상항한인 교회에서 ‘상항 학생회’가 첫 모임을 가졌다. 북가주 버클리 학생양성소 설립위원중의 한 명인 백일규는 1918년 학교측으로부터 300원의 예산을 확보해놓고 청년들에게 공부를 하라고 권면하며 신청을 기다린다는 내용의 홍보 기사를 신한민보에 매회 실었다.
그가 1918년 6월 6일 조사 발표한 ‘우리 학생 조사표’에 의하면 샌프란시스코의 한인 학생 수는 초급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모두 합쳐 22명으로 나타났다.
국어학교의 경우 샌프란시스코는 4명, 맥스웰과 윌로우스는 7명, 새크라멘토는 15명, 맨티카는 6명이었다.
1929년에는 임정구가, 1933년에는 송흥국이 Pacific School of Religion으로부터 학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1931년 문덕소가 샌프란시스코 갈릴레오 고등학교를, 데이빗 신과 캐롤 우가 1939년 샌프란시스코 주니어 칼리지를 각각 졸업했다고 기록이 있다. 또 폴 양이 샌프란시스코 주립대를 졸업하였고 1934년 이기성이 새크라멘토 주니어 칼리지를 졸업하고 H.K.송이 Pacific School of Religion을 졸업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Korean Student Bulletin 에 의하면 ‘샌프란시스코 코리언 주니어’클럽이 1929년 8월26일 형성됐다. 8월30일 정식으로 첫 모임을 열었는데, 한국 학생간의 친교와 한국 사람임에 자부심을 갖기 위해 설립했다는 목적을 밝히고 임원진도 선출했다.
1934년 The Korean Student Bulletin 은 하와이에 한인학생 수가 2천289명인데 187명이 그 해 졸업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 1936년 8월23일부터 9월2일까지는 북가주 오클랜드 밀스 칼리지에서 세계기독학생 연맹이 열려 16개국에서 150명의 학생이 참가했다. 이 모임에 한국 사람으로는 엘리자벳 리, 메리 리, 알렉산더 허가 참석했다. 1943년 12월 버클리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던 최봉윤 교수는 Korean Reader라는 책을 발간했다. 한글 챠트와 단어 간단한 문장 등으로 시작하여 지리 역사 문화 등을 다양하게 실었다. 한국어 교습을 위한 책으로 가격은 2달러였다.
1940년에 열렸던 한인 대학생 모임
주니어 한국학생 클럽은 1929년 8월 26일 15명의 학생이 황사선 목사의 지도하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족됐다. 8월 30일 첫 모임에서 프랭크 최를 회장으로 하고 미국에서 태어난 학생들과 본국에서 온 유학생과 나이 차이도 많고 세대차이도 있어 새로운 클럽이 필요하였다. 클럽의 목적은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젊은 학생들의 친목도모와 젊은 한국인 세대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한국문화와 역사를 배워 한국인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한국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새크라멘토(당시 ‘삭도’라고 불림)
1914년 3월 12일 새크라멘토 한인학교 김홍균과 김병규씨 부인이 본국 학문과 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1917년 김홍균의 힘으로 423 T St.에 2층 가옥을 얻어 침실과 식당 등 일체 가구를 설비하고 ‘삭도 한인기숙사’를 설치하였다. 새크라멘토는 노동의 중심지로 청년학생이 이곳에 많이 모이는데 기숙사가 없어 문제가 되던 중 김홍균이 설립하고 최능익이 기숙사 관리를 하였다. 학생들에게 음식도 공급하여 근심 없이 공부에만 전념하게 하였으며 겨울부터 봄까지 일이 없을 때에는 기숙사 비를 외상으로 해주었다.
일이 바쁜 여름에는 농장에 나가 일을 하여 겨울동안의 기숙사비를 갚게 했으며, 이곳에 들어 올 때는 꼭 공부하기로 작정하여야만 했다. 처음 기숙사에 모인 학생은 여섯 명이었는데 어학교습 방법은 교회를 빌어 교사를 책정하여 몇 시간씩 가르치고 입학정도 실력이 되는 학생은 공립학교에 입학시켰다.
1918년 2월2일 지방회 내에 한국어학교를 설립하고 교사 조진환씨를 선정하여 학생 5명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34년에 이기성은 새크라멘토 주니어 칼리지를 입학하고, 1935년에는 김창호가 새크라멘토 주니어 칼리지에서 미네소타 칼리지로 전학을 갔다.
스탁톤
1932년에 스탁톤에 사는 젊은 한인 학생들이 ‘Orbit Circle’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1933년 ‘Orbit Circle’의 새 임원에는 회장 헨리 리, 서기 에스더 김, 회계에는 필립 박이 선출되었다.
버클리 기숙사 양성소
1918년 1월 신한민보에는 “우리 국가의 책임이 무거운 줄로 깨닫고 자기의 몸둥어리를 반만큼이라도 희생하고자 하는 이는 버클리 학생양성소로 오시기로 작정하되, 먼저 계약금 10원을 6월 30일 이전에 보내고 그 나머지 1년 숙식비 100원은 입학할 때 가지고 오거나 그 이전에 보내도 무방하다”라는 공고가 실려 학생을 모집했다.
근처에 있는 버클리 대학과 1개 공립 중학교, 3개 사립중학교 및 그 지역 소학교에서 공부 할 수 있도록 하는 곳이었다.
버클리 양성소 설비를 완성하고 1918년 1919호 에디슨 St.에 2층집을 세내어 9월 10일 문을 열었다. “모든 기구를 완전히 설비하고 10일 문을 열어 기숙생을 받아들이는 데 청원을 제출한 학생은 9인이오 장차 올 사람이 더 있다.”라고 하였다.
1918년 10월 12일 버클리 양성소가 개설 예식을 가졌다. 버클리 학생 양성소의 설립은 북미 총회 10년간 교육사업의 처음 있는 일로 북미총회 간부와 동소 직원이 이날 하오 8시에 열린 개설예식에 참석했다. 설립위원은 백일규였다.
버클리 양성소의 설비금은 학생의 기숙사비 백 원을 포함하여 3백 원을 예산하였는데 물가의 상승으로 설비위원 임정구가 5백 원을 요구하였으나 북미총회에서는 35원만을 증가시켜 주었다.
신한민보에 나타난 북가주 관련 학생기사
◈ 1906. 1. 8:
◈ 1907. 11. 8: 새크라멘토 한인 교회당에 야학을 설치하고 서양교사를 청하여 영어와 작문을 교수한다더라
◈ 1909. 1. 20: 선생 없이 영어 배우는 책-다 없어지기 전에 50전을 보내시오. 발행소 공립신보사
◈ 1913. 8. 1: 써니베일에서 토마토 농장을 하는 김원택씨의 두아들 연성과 용성은 네브라스카에서 공부하다가 7월 27일에 써니베일로 돌아왔다.
◈ 1913. 10. 3: 써니베일은 우리한인 농업의 근거지로 한인이 끊이지 않아 학생이 많이 모여 공부를 재미있게 하므로 우리는 그 학생의 씨 명과 학급을 이 아래에 기록하여 전도의 희망을 돕고자 하노라.
구연성 중학 3년급, 김용성 2년급, 강영각 2년급, 정장손 2년급, 이보패 소학 5년급, 허순복 4년급, 허순덕 3년급, 이보슈 2년급.
◈ 1916. 11. 1: 상항학생회의 첫 모임-“상항은 가주대학에 이웃하여 한인대학생의 재류가 점차 증가하여 코리안스튜단트 클럽의 조직체가 응결하였다. 지난달 27일 하오 8시 본항 한인예배당에서 제1차 회식을 거행하여 친목회의 뜻을 보였었다.”
◈ 1916. 11. 9: 맨티카 한인학교는 그 동안 정지가 되었다가 지난달 31일에 개학하였는데 교사는 강원서씨 부인이다.
◈ 1917. 5. 10: 맨티카 재류동포 전체는 한흥국어학교 유지를 위하여 기명액 150원 중 30원이 걷혀 5인을 뽑아 위원회를 조직하고 동교에 관한 일을 수시로 협의하게 하였다. 교사의 월봉은 매삭 15원을 지출하기로 가결하였다.
◈ 1918. 1. 24: 상항 한국어학교 설립준비
상항 지방회 당국자는 31일 학교 개교식을 거행함에 각 성도의 내왕 편리를 위하여 파인 St. 최정익씨 사택에 정하고 교사는 백일규씨와 그의 부인 강엘리스씨를 선정하였다.
상항에 구체적 국어학교 설립이 처음임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본월 31일 정식 개교식을 거행하리라.
◈ 1918. 3. 17: 새크라멘토 기숙사 방학예식-하오 8시 30분 방학예식을 거행하였는데 동포 50여인이 출석하여 성황을 이루고 실업가 맹정희씨는 학생장려를 위해 20원을 기부하였다.
◈ 1918. 5. 13: 황진남씨의 화학 실습-가주 대학교 3학년에 다니는 황진남씨는 방학 후 산타크루즈 산에 올라 네 주일 동안 광산학의 험화 측량을 실습하고 상항으로 돌아왔다.
◈ 1918. 6. 6: ‘우리학생 조사표’에 미국 전 지역의 학생 수를 조사하여 발표.
이중 북가주 한인 학생(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수.
샌프란시스코 22명, 샌프란시스코 국어학교 4명, 맥스웰과 윌로우스 7명, 새크라멘토 15명, 맨티카 6명, 맨티카 국어학교 6명, 메리스빌 5인.
◈ 1918. 11. 21: 교사 출타로 오래 정지했던 샌프란시스코 한인 국어학교는 11월21일부터 열 터인데 교사는 학생 변준호가 맡았다.
◈ 1924: 죠지 강이 스탠포드에 다니면서 한인학생회 일을 했다.
◈ 1926. 8. 23: 맥스웰에 사는 송덕영의 조카 송낙근이 샌프란시스코 Bible Training School에 다니려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 1927: 알렉산더 박은 버클리에서 주요셉과 신영철은 스탠포드에서 공부하고 있다.
◈ 1928: E. C. 조가 샌프란시스코 신학교 (S.F. Theological Seminary) 에 공부하러 왔다.
◈ 1947. 8. 24: 남녀학생 33인이 본국으로부터 상항에 도착하여 각주에 있는 전문학교와 대학에 가서 각종 학문과 기술을 연구하려고 한다.
남가주 클레어몬트 한인 학생양성소
대한인국민회가 운영하고 안창호가 힘을 기울였던 남가주 클래어몬트 한인학생양성소는 클레어몬트 대학촌 안에 있던 ‘Club House’라고 부르던 한인 학생양성소였다. 어학보습 교육기관으로 한인유학생 숙소구실도 하였다.
이곳에는 학생밴드도 구성되었는데 틈틈이 음악을 연주하는 기술을 익히고 연주회도 연 것으로 알려졌다.
1917년 클레어몬트 학생 양성소 학생 밴드부
1911년 10월 14일 대한인국민회에서 돈을 내서 마련했고 처음에는 10명의 정치 망명객과 유학생이 합숙을 하였다. 1911 년부터 1917년까지 초기 한인학생들의 여관이었고 미국이라는 나라와 영어를 배우는 곳이었다. 여름에는 2세 어린이들에게 우리말과 우리 글을 가르친 배움의 전당이었다. 처음 양성소 일에 관여한 사람은 방화중, 이순기, 강영대, 임두화 등이다.
1917년에는 강영승과 장이욱 등을 교사로 대한인 유년하기 국어강습소를 설치하여 한인자녀들에게 국한문과 도화 및 창가를 가르쳤다.
한국에서 105인 사건으로 피신해왔던 곽림대가 묵었으며 도산의 부인은 이 양성소 옆에 살면서 오렌지 농장에서 일을 했다. 그곳에 살던 한인들이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며 1917년 자연히 문을 닫았다.
북가주의 한인 졸업생 명단
물론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학교를 졸업했겠지만 신한민보에 나타난 기록으로 그 시대의 학생들이 어떤 학교를 다녔으며 언제 누가 졸업을 했는지 알아본다.
1931년 문덕소, 플로렌스 하, 헬렌 신이 샌프란시스코 갈릴레오 고등학교를 졸업
1932년 조응철, 샌프란시스코 Theological Seminary
1934년 정기원, 샌프란시스코 Theological Seminary
H.K.송, 퍼시픽 스쿨 오브 Religion
1936년 제임스 박, 샌프란시스코 Theological Seminary
이정대, 스탁톤의 College of Pacific
주요셉과 신영철, 스탠포드 대학
1939년 폴 황, 샌프란시스코 스테이트 칼리지 졸업(B.A.)
제이콥 김과 폴 조, University of California
프랭크 조, University of California 메디칼 스쿨
데이빗 신과 캐롤 우, 샌프란시스코 주니어 칼리지
<버클리 대학교(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졸업생 명단>
1927 알랙산더 박, 1932 이종선, 1933 로라 송, 헨리 문, 이원규, 1934 김재훈, 1935 프랭크 최.
<버클리 Pacific School of Religion 졸업생 명단>
1916 윌리엄 헨리 용만, 1918 주근회, 1929 임정구, 1930 송흥국, 1931 전영택.
1946년 3월 28일 솔라노 소학교 졸업생 5명 중에는 김탁 목사의 2녀 문희양과 김석준 씨의 딸 재넷이 있었다.
재미 한인의 교과서 편찬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는 1911년 6월 10일 초등 국어교과서 상, 하 두 권을 편찬하고 1917년 2월 8일 국민 국어과정 상, 중, 하 세 권을 편찬했다. 대한인교민단이 국민독본 상, 중, 하를 1923년에 편찬했다. 미주에서는 대한인국민회 북미 지방총회가 1909년 11월 2일에 국민독본을 편찬하고, 1921년 6월 2일에 초등국민독습 상, 중, 하 세 권을 편찬했다.
미국의 소리
미국에 와서 대학에서 연구를 하던 사람들은 고국과의 연락이 두절되면서 독립투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당시 항일 정보 선전의 절대적 역할을 했던 방송 ‘미국의 소리’등의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지식인들이 샌프란시스코로 모여들었다. 상항감리교회 김하태 목사는 이 방송의 편집 및 송출에 참여하면서 독립투쟁에 참여한 동포들에게 교회가 유익한 기관이 되도록 노력하였다.
한인재단 장학사업
1907년 7월17일자 샌프란시스코 공립신보에는 “학생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공립협회에 학무비를 내어 총괄해야 한다.”고 교육의 필요성과 교육제도 마련 방안을 제시했다. 공부를 권하려고 공립협회에서 학생회를 조직했으나 재정부족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함을 알리고 장학 사업에 관해 실었다.
“백 사람이 각자 50전씩 내면 50원이라. 50원을 가졌으면 학생 3, 4명을 공부시킬 것이오, 천 명이 협력하면 3, 40명은 교육할 터이다” 라고 하며 “1, 2원 자비 가지고 공부 잘하는 것이라 할 것은, 우리 한인 중에 다른 사람 공부 잘하는 것이 곧 내가 공부 잘하는 것과 같다”고 장학금 모집을 고무시켰다.
공부할 학생을 공립협회에서 공천하여 택하고 이들을 학무부의 규칙에 따라 교육한 다음 이들이 학업을 마친 후 조국으로 돌아가 학생을 교육하면서 광복사업에 매진토록 하자고 역설하였다. 9월25일에는 교육이 재정문제로 구애받지 않도록 ‘상항 공립협회 찬성금 모집 취지서’를 본국의 매일신보사와 교회 및 매일신보 지사에 찬성금을 내어 달라는 모금운동을 벌였다. 찬성금을 매일신보사에 기탁하여 환송케 하는 방법으로 하고 학무부의 관장 하에 선발고사를 치루고 선발된 학생에게는 장학금 지급의 혜택을 주었다.
응시자격은 “18세 이상 25세 이하로 신체가 건강하고 열성을 가진 정직한 사람”이었다. 시험은 영문 작문 70자 이상 90자 이하로, 영어문답과 그리고 국한문 작문은 백자 이상 150자 이하로 하였다. 순 한문을 국문으로 번역도 해야 했는데 선발된 학생은 졸업까지 교육부에서 학금을 지출하고 졸업 후에 제약은 없었다.
1908년 8월 26일에는 공립협회의 방화중, 이순기, 강영대, 임정구등 10명이 발기하여 로스앤젤레스 클레어몬트 지방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공립학교로 학비는 없고 기숙사비만 1년에 75원, 반년에 42원을 내면 됐다. 학생들은 공립협회 학무부 명의로 1908년 9월부터 학생을 모집하였다. 1911년 9월 초순에 준공이 되어 10월14일에는 내, 외국 인사를 많이 초청하여 낙성식을 하였다.
1955년 1월부터 북미 대한인국민회가 국내에서 학비 곤란으로 취학하지 못하는 고학생들의 교육을 장려할 목적으로 서울정치대학 학장 유석창과 연락하여 매년 1200달러를 보냈다.
1957년 5월 9일에 재미 한인 사회의 유지인사들이 중가주 리들리 지방에 모여 우리민족의 민주주의 발달과 고등교육장려를 위한 ‘한인재단’을 설립하였다. 비정치적, 비영리적 조직으로 가주 정부의 관허를 얻고 도미하는 유학생을 지원하였다.
유망한 학도의 보증과 학교와의 연락과 장학금을 주선하며 경제적 후원을 목적으로 하였다. 과학적 교육적 지식 개발에 필요한 연구와 국문 또는 영문 출판을 후원하고 교육적 자선적 행사를 후원할 목적이었다.
조직은 이사부와 집행부를 두고 그 안에 재정, 학무, 연구, 사교, 출판의 다섯 위원부를 두어 일을 분담하였다. 회원은 1천 달러 이상의 기본 재산이나 부동산을 기증하는 인사를 평생회원으로 하였다. 재단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재정을 기증하며 봉사하는 인사를 명예회원이라 하고 평생회원과 명예회원을 합한 전체를 재단의 정상회원으로 하였다.
재정은 기부와 원조로 충당하게 되는데 설립초기 리들리의 김형제 상회가 기부한 10만 달러의 부동산이 기초가 되었다. 그 부동산에서 첫 해에 수입된 7천 달러와 회원의 기부금 2천4백 달러로 제1차의 장학경비를 감당하였다. 이 재단의 설립에는 김호와 김원용이 혁혁한 도움을 주었다.
도서출판
◈ 영한사전-1910년 3월 2일 이민동포 영어교육의 필요와 요구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이원익이 저작하고 대한인국민회 학무부에서 출판했다.
◈ 독립정신-1910년 3월 28일 미주 한인의 교양을 위해 미주에서 이승만이 저작하고 대동공보사에서 출판했다.
◈ 국민개병설-1911년 4월 10일 군인양성을 장려할 목적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용만이 저작하고 신한민보사에서 출판했다.
◈ 한국경제사-1920년 2월 8일 교양의 필요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백일규가 저작하고 신한민보사에서 출판했다.
◈ 한국의 실정(The Truth About Korea)-1919년 7월1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국내의 독립운동을 선전하기 위하여 영문으로 출판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