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독립운동사

“샌프란시스코는 단순한 이민의 시작점이 아니라, 독립운동과 한국인 공동체의 성장의 중심이었다. 초기 한인들이 겪었던 고난과 희망, 그리고 독립을 위한 헌신은 오늘날 미주 한인 사회의 기반이 되었다. 앞으로도 이 역사는 후손들에게 영감을 주며 계속될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초기 한국인의 이민사

  1. 미국으로 향한 첫 발걸음

2023년은 한국인의 미국 이민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하지만 그 역사는 1903년 하와이로 첫 공식 이민자들이 도착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는 한국인의 이민 역사에서 독보적인 역할을 해왔으며, 단순한 정착지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1. 한국인의 샌프란시스코 정착과 초기 활동

1883년 7월 16일: 조선 고종이 민영익을 단장으로 한 보빙사절단을 미국으로 파견하며, 조선과 미국 간의 공식적 교류가 시작되었다.

1900년 1월 15일: 하와이가 미국령이 되기 전, 양백인(31)과 김이유(34)가 미국 이민국 기록에 최초로 등재된 한국인 이민자가 되었다.

1903년 9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 친목회가 설립되며, 초기 한인 사회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1. 독립운동과 샌프란시스코

1905년 4월 26일: 공립협회 창립. 이후 11월 14일 공립신보를 발간하며, 한국인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6년 12월 16일: 상항한인감리교회 설립. 신앙뿐만 아니라 한인 커뮤니티의 중심지가 되었다.

1907년 3월 2일: 대동보국회 설립, 4월 26일 공립신보 활판인쇄 개시.

1908년 3월 23일: 장인환과 전명운 의사가 친일파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하는 사건 발생. 이 사건은 미주 한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09년 2월: 공립협회가 국민회로 확대 개편.

1910년 2월: 대한인국민회로 개편되며 조직이 강화됨.

  1. 한인 사회의 성장과 독립운동의 확산

1913년 5월 13일: 흥사단 창단. 안창호 선생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과 교육 활동이 이어짐.

1914년 6월 5일: 오클랜드 감리교회 설립.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이 더욱 활발해짐.

1920년 7월 5일: 윌로우스 비행사양성소 설립. 이는 독립운동을 위한 조종사 양성소로, 한국 독립군 양성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38년 4월 17일: 대한인국민회가 샌프란시스코에서 LA로 이전하며, 중심지가 옮겨감.

1945년 4월 25일: 샌프란시스코 국제회의가 열리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파견하여 한국 독립을 위한 외교전을 펼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