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는 한국전쟁 직후, 비행기도 여권도 없이
노래로 먼저 도착한 도시였다.
그리고 그 노래는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그래도 우리는 꿈을 꿀 수 있다”는 작고 단단한 증거였다. 이 도시의 이름이 1953년 한국 대중가요 속에서 울려 퍼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샌프란시스코는 이미 한국인의 기억 속에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는지 모른다.

샌프란시스코 –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비너스 동상을 얼싸안고 소근 대는 별 그림자
금문교 푸른 물에 찰랑대며 춤춘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나는야 꿈을 꾸는 나는야 꿈을 꾸는 아메리칸 아가씨
네온의 불빛도 물결 따라 넘실대는 꽃 그림자
빌딩에 날아드는 비둘기를 부른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내일은 뉴욕으로 내일은 뉴욕으로 떠나가실 님이여
메트로 포리탄 오페라에 꿈을 꾸는 님 그림자
달콤한 그 키스에 쌍고동이 울린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나이트 여객기가 나이트 여객기가 유성같이 날은다
1967년, 스콧 맥켄지가 노래한 “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Flowers in Your Hair)”는 히피와 평화, 사랑의 도시로서의 샌프란시스코를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하지만 이 도시의 이름이 노래 제목으로 처음 불린 시점은 놀랍게도 그보다 14년이나 앞선 1953년, 한국이었다.
1953년.
전쟁은 막 끝났고, 폐허 위에 남은 것은 피로와 상실, 그리고 막연한 그리움뿐이었다.
그해 발표된 노래 〈샌프란시스코〉는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그리고 장세정의 목소리로 세상에 나왔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이 노래는 지나치게 이국적이다. 비너스 동상, 금문교, 태평양, 네온빛, 오페라….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이 노래의 핵심이었다.
전쟁 직후, 왜 샌프란시스코였을까
작사가 손로원은 부산항에 입항한 적십자기를 단 스웨덴 국적의 병원선 두 척을 보게 된다.
하얀 옷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 그들은 전쟁의 한가운데에 ‘평화’라는 낯선 단어를 들고 도착한 사람들이었다.
그 순간 손로원은 생각한다.
“이 평화의 사도들에게, 노래로라도 보답할 수는 없을까.”
그가 떠올린 도시가 바로 샌프란시스코였다고 한다. 직접 가본 적도 없고,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에게는 지도 속 이름조차 생소했던 곳.
그러나 샌프란시스코는 태평양 너머, 전쟁이 닿지 않은 세계, 그리고 평화와 문명의 상징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갈 수 없기에 더 빛나던’ 도시의 이름
1950년대 한국은 해외여행을 꿈꾸는 것조차 사치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노래 속에서 세계를 여행했다.
〈인도의 향불〉
〈페르샤 왕자〉
〈나폴리 맘보〉
〈하와이 연정〉
이국적인 지명은 곧 희망의 언어였다. 〈샌프란시스코〉 역시 그 연장선에 있었다.
이 노래에서 샌프란시스코는 현실의 도시라기보다 “가장 가보고 싶은 곳”, “꿈을 꾸어도 허락되는 장소”*에 가까웠을 것이다.
장세정에서 백설희로, 노래의 주인이 바뀌다
이 노래를 처음 부른 장세정은 훗날 실제로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1962년, 〈봄날은 간다〉로 더 널리 사랑받던 백설희가 이 곡을 다시 취입하면서
〈샌프란시스코〉는 진정한 대중가요로 자리 잡는다.
매력적인 음색, 안정된 발성, 그리고 시대의 정서. 사람들은 백설희의 목소리를 통해 샌프란시스코를 ‘기억 속의 도시’*로 받아들이게 된다.
1970년대에 이 노래가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한 한인 순회공연의 주요 레퍼토리로 불렸다는 사실은 이 노래가 단순한 유행가를 넘어
디아스포라 한국인의 감정과도 연결되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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