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전북 금산에서 태어나 선교사가 세운 전주의 신흥중학교를 졸업하고 군산의 영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11년 이승만의 연설을 듣고 감격, 철저한 이승만 추종자가 되었다. 모교인 신흥학교에서 수학, 물리학을 가르치다 1916년 상해로 출국 미국으로 망명했다.
하와이에서 이승만을 만난 것을 계기로 평생 독립운동과 독립자금을 대며 이승만을 도왔다. 벼 농장, 포도밭 일을 하다 UCLA 와 남가주대학에서 공부하며 김용중과 농작물 위탁 판매 사업을 벌였다. K&S Jobbers(김 송 위탁판매소)를 설립하고 중가주 다뉴바에 과일포장회사도 설립했다.
37세에 UC 버클리를 졸업한 그는 1929년 대한인동지회 북미 총회를 결성할 때 로스앤젤레스대표로 참석하였다. 로스앤젤레스 대한인동지회 회관 마련에 중주역할을 하였고 ‘북미시보’발행에도 참여하였다. 동지회와 북미총회 재무와 총회장으로 활약했다.
한인 2세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것을 주장하여 1972년 남가주 무궁화한국학교를 설립했다. ‘Song’s Packing’회사는 초기 이민이 노동으로 큰 타운을 이루던 다뉴바에서 한인들의 생활터전이 되었다. 이승만이 하야, 하와이로 이주하자 송철은 여러 번 이승만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동지회는 침체됐다. 정부에서는 199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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