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여자 애국단:여자라고 못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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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이민의 한인여성들은 자신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그러다보니 서로 간에 조국사랑 정신을 고취시키며 여성 상호간의 친목을 목적으로 한 부인회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이에 뜻을 둔 대표 격 여성들이 모여 각 지방별로 부인회를 조직하고 그 지방 여성들은 모두 부인회에 가입했다. 초기의 한인여성들은 3.1 운동 이후 조국을 위해 한 푼도 돈을 내지 않은 점을 지적하고, 독립운동을 위한 모금운동을 펼칠 것도 결의했다. 대표자들은 조국의 형제들이 일제치하에서 능욕을 당한다는 소리를 듣고도 미주의 여성들은 자신의 사치에 골몰하고 있다는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모든 한인 여성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조국광복 운동에 참여하라고 촉구했다.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최초로 한인 부인회가 조직되자, 1914년에는 새크라멘토에서 한인 부인회가 조직됐다. 1917년에는 북가주 맨티카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활동한 부인전도회가 생겼고 1919년에는 중가주 다뉴바에 신한부인회가 조직되어 활동에 들어갔다.

3.1 운동으로 고무된 각 지역 부인회는 함께 연합할 경우 그 세력이 더 커진다는 뜻을 두고 인근지역끼리 통합, 또는 전체 연합회 등을 조성하는데 힘을 기울이게 된다.

“미주 안에 몇 개 부인회가 있으나 그들이 합하지 않으면 힘이 약할지니 반드시 합동하여 한 개의 통일 단체를 만들고 그로써 조국 광복에 대한 우리 부녀들의 운동을 강화하자”고 외치면 1919년 5월 18일에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와 다뉴바의 신한부인회가 먼저 하나로 합쳤다. 부인회 통고문이 발포되자 1919년 8월 2일 다뉴바, 로스앤젤레스, 새크라멘토, 샌프란시스코, 윌로우스 부인회 대표자들이 다뉴바에 모여 합동 발기대회를 열었다. 이 연합 단체의 이름은 ‘대한여자애국단’ 또는 ‘대한부인애국단’이라고 불렸는데, 이 단체가 여성들만의 힘으로 조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는 지대하다.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최초의 한인단체는 1903년 9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가 조직한 한인친목회였다. 이 단체는 1905년 공립협회로 확장되어 독립운동 및 정치활동을 하게 된다. 12월에는 친목회 발기인이었던 장경은 공립협회에서 나와 교육진흥을 목적으로 김미리사, 김우제 등과 대동교육회를 설립했다. 1908년 3월 대동교육회는 정치적 목적에 가까운 대동보국회로 확대되었다.

대동보국회 결성에 이어 1908년 5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 최초의 한인여성단체인 한국부인회(The Korean Women’s Association)가 설립된다. 샌프란시스코 거주 ‘미스 레익’의 집에서 한인 부인들이 모여 조직했다. 한국부인회가 조직되던 날은 샌프란시스코의 남자 동포도 수십 명이 참석했다. 회의 진행과 ‘여자의 의무와 사회권한’이라는 주제의 연설이 3시간에 걸쳐 있었다. 김미리사가 창립취지를 설명하고 집주인 미스 레익이 오르간을 치고 한국아이들이 영어로 찬미가를 불렀다. 설립취지는 자녀들의 국어교육장려, 교회사업후원, 정치시비 불간섭, 동포간의 친목증진이었다.
회장은 대동교육회와 대동보국회 유일한 여성 발기인이었던 김미리사가 맡게 되었고 대동보국회 주도인물 장경, 문경호, 이민식의 부인들이 참여하였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중심의 재미 교포사회가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로 나뉘어 다소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었기에 부인들은 부인회만큼은 정치적 시비를 초월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한국부인회는 조국에 있는 고아원을 돕기 위해 연필을 판매하는가 하면, 자녀들에게 조국의 얼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사는 동포간의 친목 증진에 힘썼다.

새크라멘토

1917년 3월29일 캘리포니아 주의 수도 새크라멘토에서 대한인국민회 사업의 하나로 일본 물건을 배척할 목적으로 한인부인회가 조직되었다. 회장은 양제현이 맡았고 재미여성들도 광복사업에 동등한 국민으로 참여하겠다는 의지로 조직되었다. 한인부인회가 후원하기로 한 대한인국민회는 1910년 5월10일 조국광복을 목적으로 조직되어 시베리아 만주까지 지방총회를 두었고 116처에 지방회가 있었다.

1919년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는 7월9일부로 미합중국 대통령에게 “왜적의 학살과 능욕을 받는 내지 동포들의 고통을 생각하여 일본의 큰 죄악을 교정케 해달라.”는 청원서를 대한부인애국단 이름으로 내기도 하였다. 통합된 대한부인애국단이 결성되기 전이었으나 국민회 산하 활동이라는 의지아래 다 같이 통일된 부인애국단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새크라멘토를 포함한 각 지방의 부녀들은 부인애국단의 이름으로 50~100달러로부터 많게는 300~400달러의 애국금을 모아 국민회로 보냈다. 신한민보는 부인애국단이라는 독립된 명칭으로 애국금 납부자 이름을 신문에 게재했다. 3월24일에서 7월31일까지 납부자는 약 150명이었는데 당시 재미 부인수가 약 100명이라 하였으니 상당수가 2회 이상 납부한 셈이다. 그 가운데 10달러 이상 낸 사람이 무려 90여명이며 30달러이상의 고액 납부자는 13명이나 되었다. 애국금 모금은 재미여성들의 항일광복운동을 위한 대동단결의 역량을 보여준 것이었다.

독립의연금 영수증

맨티카

캘리포니아 지역의 부인회 운동은 여자전도회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여자전도회는 오클랜드,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등지에 지회를 둘 만큼 세가 확장되었다. 북가주 새크라멘토 근처에 위치한 맨티카에서는 1917년 3월5일 타지에 전도사를 파견하여 기독교 복음을 전파할 목적으로 ‘여자전도회’또는 ‘대한인부인전도회’라고 불리던 여성단체가 조직되었다. 한신애, 김중생, 최돈신, 전순희, 김원도, 강유신이 대표 발기인이었다.

한국부인전도회는 회무를 확장하기 위하여 3월 17일에는 일반 등사 기계까지 구입하며 조직을 계속 발전해 나갔다. 이 단체는 19세기말 한국인에게 개신교가 전파된 이후, 한국여성이 중심이 되는 능동적인 복음전파사업의 효시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여자전도회는 하나님이 창조한 바, 남자와 여자는 본래 동등함으로 여자도 남자와 같이 교회를 설립하고, 학교도 세우고 자선사업을 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기문을 발표했다. 단순한 종교 활동적인 조직이 아닌 여성의 평등을 촉구하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남자를 내시고 또 여자를 내신 것은 남녀평등을 허락하심이라. 그러므로 지혜를 같이 주시고 복도 같이 주사 막달라 마리아는 구주 당시에 유명한 일군으로 쓰시고 여왕 빅토리아는 근세 맹주의 권력을 맡기셨으니 이를 보면 여자가 원래 남자의 아래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여 신성한 민족 이천만 동포의 반수를 차지한 우리 한국여자들은 도장 방 작은 천지에 갇혀 들어앉아 다만 흥분을 일삼으며 머리를 숙여 인류사회의 한 부속물이 되었느뇨. 과연 가엾은 일이로다.(중략) ……

지금에 와서는 서로부터 동으로 밀쳐 나오는 풍조가 수천 년 닫은 문을 깨쳐 놓으매 모든 기회가 여자를 위하여 열려 남자가 교회를 설립하면 여자도 교회를 설립하고 남자가 학교를 세우면 여자도 학교를 세우고(중략) ……

우리 재미한인 여자는 단출한 살림에도 바느질도 안 하고 10년 동안 귀한 광음을 보내었으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오.(중략) ……

그러므로 맨티카에 재류하는 우리들은 여자전도회를 발기하여 재미한인 자매동지를 부르나니 정성이 같고 이 같은 자매동포는 다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 충성스러운 일군이 되기를 바라나이다.”

한인들에게 뿌리 깊은 유교적 사고방식이나 당시의 사회적인 인습에 비추어볼 때 여자전도회가 낸 위의 발기문은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이 발기문이 신문에 게재되고 각 집에 부인회와 부인들에게 참여 공문이 전달되자 제일 먼저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가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당시 한인사회에서 대동단결은 매우 힘들었는데 목적을 일치하여 단결을 도모함은 동포의 행복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일반 부인회가 종교적 단체에 이처럼 쉽게 호응할 수 있었던 것은 재미동포 대부분이 교인이거나 또한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여성이 평등적인 사회활동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1936년 대한여자 애국단 창립 17주년 기념

초대 회장직으로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 회장인 양제현으로 선출한 것 역시 여성계의 단결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자전도회는 1917년 4월 15일까지 발기자를 모집하고 5월 24일 통신선거를 통해 회장 양제현, 부회장에 김자혜, 서기 강유신, 회계 한신애, 간사 김현도를 선출했다. 그해 9월 스탁톤 부근에 거류하는 17명 부인들이 많은 연보를 기부하는 등 각처에서 지원과 호응도가 컸다.

1919년 미주 내 여성단체들이 통합되는 과정에서 전도회는 사업을 중단하고 1927년부터 다시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기금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회비에만 의존하지 않고 각종 환영회나 결혼식이 있을 때 행사에 음식을 장만해 주어 수익을 재정에 보태 1931년 결산 때는 118달러나 남아 있었다. 1931년에는 만주사변으로 헐벗고 있는 교포들을 위해 시내 각 세탁점과 가정을 탐방하여 의복을 수집해 만주로 보내고 조국의 어려운 동포를 구제하는 사업도 지속적으로 펴나갔다. 캘리포니아 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대한여자 애국단은 1919년 8월 5일 다뉴바에서 창립된 이후 광복이 될 때까지 활발하게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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